욥은 극단적 괴로움으로 살맛을 잃어버렸다. ‘~하겠느냐?’라는 말이 리드미컬하게 반복된다. 전능자의 화살을 맞아 영혼에 독이 퍼진 자의 절망이 도드라지게 강조된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이 갑자기 낯설게 보인다. 친밀함이 소원함으로 바뀐다. 빛은 어둠과 자리를 바꾼다
죽을 수만 있다면 차라리 죽고 싶다고 말했던 욥에게 또한 외로움의 무게까지 얹혀졌다. 마주 잡을 손인 줄 알았던 벗들의 손이 그를 밀쳐내고 있다.
성좌에서 떨어져 나온 별처럼 어둠의 공간에 홀로 유영해야 한다. 폴 틸리히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구별한다. 쓸쓸함이 홀로 있음의 괴로움이라면, 외로움은 홀로 있음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존재론적 쓸쓸함을 견디기 위해 시끄러운 소음 속으로 달아나곤 한다. 파스칼은 말한다. “우리의 불행은 거의 모두가 자신의 방에 남아 있을 수 없는 데서 온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서 홀로 기도하셨다. 그 외로운 시간은 우리 존재를 영원한 중심에 비 끌어매는 시간이 된다.
(10절)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참 슬픈 소원이다. 차라리 하나님께서 멸하기로 작정하고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면 그것을 위로로 삼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이 다 쇠약해진 욥은 여전히 죽음에의 이끌림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한 가지 자부심이 남이 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잠 23:1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