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을에서 귀신 들려서 난동을 부리고 그래서 사람들이 쇠사슬로 묶고 추방시켜 버린 그래서 돌무덤에 혼자 살면서 자신을 자해하던 사람이다.
그의 눈은 광기로 흐려있고, 머리털은 뻣뻣하게 굳은 채 풀어헤쳐져 있다. 그의 온몸은 자해한 핏자국들이 엉겨 붙어 있고, 그의 옷에서는 구더기가 나며 냄새가 진동한다.
밤낮 무덤 사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던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사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호통치신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입니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하지 마소서’
그 속의 귀신들은 나오기는커녕 도전하고 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내 이름은 군대니이다.’
귀신 무리 떼거리가 그 안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귀신 들린 자의 간구는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시지 말라’는 것이다.
왜? 떠나길 싫어했는가?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귀신의 거하기에 너무나 적합하기 때문이다. 거라사인 돼지 집단사육지의 ‘돼지떼’에 들어가기를 주님이 허용하셨다.그리하여 2000마리의 되지가 무려 10리 거리를 달려서 갈릴리 바다에 가 몰사당했다.
왜 주님은 돼지떼 들어가기를 허용하셨나?
돼지 치는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런 손해 보상 없이 남의 사유재산을 일방적으로 침해당한 격이 아닌가?이때, 돼지 치던 자들이 마을에 달려가 이 소식을 전하게 되고, 마을 사람들이 나온다.그리고, 그 사람들은 예수께 간청하는데 ‘예수께서 그 지방을 떠나 달라’는 것이다.사태를 파악해 보니 귀신 들린 자는 온전하여져서 옷을 입고 바로 앉았는데 그것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무관심했다.
그들이 안타까워했던 것은 돼지 시체 2000마리가 바다에 익사해서 시체가 동동..
만일 예수님을 누구네 집에 모셨다가 이제 누구네 집 재산이 거들 나는지..
소 100, 양 3000, 염소 1000..
거라사인의 마음은 한영혼에 대한 구원보다도
2000마리의 경제적 손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돈에 눈멀어 인간의 소중함을 모르는 그 동네 그들의 마음은 귀신에 씌어진 마음이다.
반면, 예수님은 돼지 2000마리를 희생시키면서 까지 한 사람을 고치고자 하셨다.
귀신이 이 마을에 집착한 이유가 무엇일까?
인간보다 돈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돼지 2000마리를 위해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은상식(?)이 되어 버렸다.
돈에 중독된 사회 돈에 중독된 마음이다.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 돈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는 마음이며, 우리의 생존에 대해 우리가 가지는 애착이다.
하지만, 이 돈이 우리를 포로로 잡으려 하고 우리의 마음을 강퍅게 만들려 할 때.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잘 먹고 잘살기 위해, 남보다 더, 아니 남들만큼은 살기 위해, 난 신앙생활을 잠시 뒷전에 물려야 되겠다는 이 세상의 논리에 굴복해서는 안된다.
자신이 부를 쌓고, 자신의 안전을 돈이 책임져 줄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주위의 이웃을 돌아보지 못하는 마음에 일격을 가해야 한다.
어리석은 부자처럼 곡식을 쌓을 곳이 없어 창고를 헐어야 할 고민에 잠 못 드는 자라도 하나님이 그 여러 해 취할 양식에도 불구하고, 그날 밤에라도 그 영혼을 찾으실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 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돈보다 인간이 더 소중하다는 사실.
이 사회를 향한 탄식과 분노와 눈물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두 종류의 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수를 좇아 버리던지, 예수를 좇아가든지. 거라사인들은 예수님을 쫓아내고, 광인은 예수를 좇아가고 있다.
거라사인은 예수님 앞에 섰을 때, 그들의 마음속까지 펼쳐진 책을 들여다보듯 환하고 읽고 계신 것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이 계속 계시면 그 죄상이 드러나고 폭로될 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한 아담처럼 무화과에 숨듯 숨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음 받은 광인은 그토록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열망하고 있는가?
그는 미쳐 있는 동안은 그리스도를 싫어했고, 예수님을 쫓아 내버리려 했다.
7절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를 괴롭게 마소서’
하지만, 그랬던 그가 이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와 함께 있겠다고 떼쓰고 있다.
그는 고침 받았다. 아무도 그를 가장 아끼는 사람까지도 속수무책 해줄 수 없는 일을 예수님이 해주신 것이다. 그 행복, 그 기쁨에 겨워 “내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 하는 것이다. 바울도 이전에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모욕했지만, 예수님을 뵙고 그분이 누구신지 깨닫고 “내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