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살 곳을 찾아 떠돌아다니다 울창한 숲에 다다랐다. 겨울에 나무를 베어 모닥불을 피우고 더 많은 나무를 베어 집을 지었다. 여름이 되어 따가운 햇볕을 가리기 위해, 현관에 그늘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또 베었다. 바람에 물건들이 나뒹굴자 한 그루의 작은 나무를 제외한 모든 나무를 베어 물건을 꽁꽁 묶었다. 그리고 나무로 장벽을 높이 세웠다. 빨래도 날아가지 않고 텃밭의 채소도 바람에 쓰러지지 않아 좋았다. 그런데 장벽 밖이 보이지 않게 되자 사람들이 변해갔다. 마을은 삭막해졌다. 왕래는 없어졌고 마음에 장벽이 생겨난 것이다.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욱 장벽을 높이 세우고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남이 차지하기 전에 마지막 나무를 베어오라고 지시했다. 장벽을 넘어 그 작은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간 아이들은 서로 만나 웃고 뛰고 장난치고 노래 부르고 씨앗을 모았다. 아이들은 날마다 마지막 나무를 찾아갔고 나무가 쑥쑥 자라는 것을 보고 뿌듯해했다. 아이들은 차마 마지막 나무를 벨 수 없었던 것이다. 거센 바람에 널빤지와 울타리가 날아가자 어른들이 직접 나무를 베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환한 햇살 아래 사람들은 비로소 서로 적이 아니라 오랜 친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의 노랫소리와 시원한 바람, 햇살에 드리워진 그늘 등 풍경을 본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함께 장벽을 무너뜨렸다. 사람들은 씨앗을 심고 어린나무를 돌보고 서로 이야기하고 노래를 불렀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숲도 함께 자랐다. 그렇게 마지막 나무는 첫 번째 나무가 되었다.
한 그루의 작은 나무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그림책이다. 이 이야기는 한 그루의 작은 나무에서 끝나면 안 된다. 작은 나무를 넘어 인간을 포함한 이 지구의 생태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고 잘 가꾸어야 하는지를 의미 있게 보여주는 훌륭한 그림책이다. 생태계 파괴는 단지 나무를 베는 문제가 아니다. 이 그림책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자연환경, 즉 생태계 붕괴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을 파괴하고 인간관계와 소통도 단절시켜 끝내는 문명의 파멸까지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단지 나무를 베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 그림책을 통해 생태계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태계의 의미와 인간을 둘러싼 제반 관계를 전반적으로 살펴보자.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 문명의 발달과 맥을 같이 한다. 현대 세계의 물질문명은 인간에게 많은 물질적 편의를 제공한 것이 사실이지만 생태계를 파괴적인 국면으로 몰아가고 있어 그에 대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현대 사회에서 자연과 인간 사이의 총체성은 상실되었으며 여기에서 파급되는 문제들은 인간들의 삶을 심각한 위기의 국면으로까지 몰아가고 있다. 서구의 근대 자본주의와 기술문명은 인간을 자연보다 우위에 두면서 생태계를 파괴하였다. 그 결과 환경오염을 넘어 생태계의 전면적인 붕괴현상으로 이어졌고 인간의 생존마저 위기에 빠뜨렸다. 또한 사람 사이에서도 효용적 이용가치만을 따지게 되면서 인간이 수단화, 상품화되었으며 인간 정신의 황폐화를 불러일으켰다. 오늘날 생태학이 주목받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생태문학은 자연과 인간의 교류 내지 합일을 목적으로 한 서정성을 담보하고 있으며 자연과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 사이에서도 바른 관계를 지향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현대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안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생태문학을 넘어 생태주의는 자연중심주의, 미학적ㆍ예술적 이성의 강조, 전체론적 인식, 가치중심적 인식, 관조적 감상과 내면적 체험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의 전환 등으로 나타난다.
먼저 자본주의의 시스템에 대해 알아보자. 자본주의는 과학의 발달과 함께 발전하게 되었는데, 자연의 파괴를 넘어 인간 정신의 황폐화와 인간 소외를 불러일으켰다. 자본주의는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나의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투자되고, 그 투자는 다시 재생산되고 재투자되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끝없는 잉여를 창출해 내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은 철저히 그들의 생존방식을 무시당한 채 희생되고 파괴되었다. 이 모든 과정은 바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 불러온 자본주의의 모습인 것이다.
자본주의 하에서는 경제적 가치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 상품화되는 경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성 상품화는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존재 자체도 돈이 되면 상품화되는 추세다. 모든 것을 경제적 효용가치로 판단함으로써 사람사이의 관계도 업무적으로 변하였으며 인간의 존재 또한 효용가치로 환산돼 자신에게 이용가치가 있는지만 따지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바로 필연적으로 인간정신의 황폐화와 인간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자본주의 하에서는 욕망이 있는 그대로 분출되는 생산력 위주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진다. 경제적 효용가치를 위주로 하는 삶의 방식을 취할 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욕망을 최대한 부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욕망은 본래 인간으로 하여금 쾌락을 추구하도록 하고, 그와 관련된 대상들을 소유하도록 부추기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런 특징의 근대 자본주의는 생태환경의 파괴와 인간 소외를 필연적인 결과로 잉태하였다.
서구의 근대문명은 이성중심의 인간중심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인간관 내지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중심의 세계관은 인간의 성을 우위에 놓으며 자연을 열등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런 사고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이용가치와 수단으로만 생각하게 만든다.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게 하는 개체중심적 성향을 가지게 한다. 개체들의 행위 성향 속에는 개체들 간의 경쟁을 통해 자신의 상대적 이점을 추구하려는 ‘개체중심적 성향’과 주변 개체와의 협동을 통하여 전체의 화합을 추구하는 ‘생태중시적 성향’이 공존하게 된다. 이러한 개체 생명의 성향을 사회에 적용시킨 경쟁위주의 형태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생계활동에 있어서 생태적 고려보다 수익의 확대에 더욱 관심을 쏟게 되며, 협동위주로 구성된 사회에서는 생태적 고려를 통하여 더욱 장기적인 공동의 선을 추구하게 된다.
이제 그림책을 다시 살펴보자. 사람들은 살 곳을 찾아 여기저기를 헤매다 숲을 발견하고는 집을 짓고 산다. 사람들의 필요로 나무를 하나씩 벤다. 그 필요는 사람들의 안락한 삶 이상의 잉여가치를 낳고 욕망을 낳는다. 모닥불을 위한 나무가 필요하고 현관의 그늘을 위한 나무가 필요하고 의자와 각종 조각을 위해 나무가 또 필요하고… 이렇게 사람들의 욕망은 끝이 없다. 급기야 더 큰 안락을 위해 커다란 장벽을 짓는다. 그 결과 사람들 간 소통은 사라졌고 마을은 삭막해졌다. 이기심이 극에 달하자 마지막 나무를 먼저 베고자 한다. 이렇게 생태계의 순환은 인간의 이기심에 의해 절단되고 만다. 그러면 자연과 인간 모두를 파멸로 이끌고 말 것이다. 그리고 인간 사이도 적대적 이기심과 경쟁만이 남아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게 된다. 묻지 마 범죄와 이전에 없었던 각종 흉악 범죄의 근본 원인이 바로 적대적 경쟁이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결과일 수 있다. 그 끝은 인간과 생태계 모두의 공멸이다. 인간이, 인간의 이기심이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많은 미래 학자들이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을 극대화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계속 유지한다면 현재의 인류는 22세기를 맞이하지 못하는 마지막 인류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현재 심각한 지구의 기후위기를 보라. 이것은 인간에게 보내는 지구 생태계의 경고이자 애원이다. 정이 넘치는 따뜻한 인간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서도, 지구 생태계의 순환을 위해서도 인간의 무한 이기심은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이 그림책을 통해 생태(학)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인간의 이기심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인간의 무한한 욕심을 여기서 멈추지 않으면 지구의, 인류의 미래는 결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