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난 감각, 낯선 일상
여긴 어디지?
눈을 떴을 때, 의식은 파편화되어 흩어져 있었다. 어떤 생각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고, 오직 지독하게 희미한 통증만이 해일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흐릿한 시야 사이로 눈부시게 차가운 하얀 불빛과 힘없이 늘어진 백색 커튼이 보였다. 본능이 속삭였다. 이곳은 병원이다.
‘병원’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순간, 관자놀이가 터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던 기억, 신호등의 초록 불빛이 깜빡이던 장면까지는 선명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기억은 누군가 거칠게 도려낸 듯 암전(暗轉)되어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팔에 힘을 주자, 억눌려 있던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끔찍한 통증이 전신을 휘감으며 근육 하나하나를 헤집어 놓는 기분이었다. 겨우 고개를 돌려 내려다본 몸은 참혹했다. 두꺼운 깁스와 붕대로 칭칭 감긴 사지. 그제야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부서졌음을 실감했다.
"눈 뜨셨네요. 얼마나 깊이 잠드셨는지 아세요?"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하얀 유니폼을 입은 간호사가 서늘한 커튼을 걷고 들어왔다.
이환은 무어라 대답하려 입술을 달싹였으나, 갈라진 입술은 비명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쩍쩍 갈라진 목구멍에서는 쇳가루가 섞인 듯한 거친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간호사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이환의 어깨를 지그시 눌러 고정했다.
"가만히 있으세요. 사고가 워낙 컸어요. 일주일이나 의식이 없으셨습니다."
일주일. 지워진 기억의 공백만큼이나 커다란 불안이 엄습했다. 채영이는 어떨까.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답답함이 육체적 통증보다 더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며칠 뒤, 병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그토록 그리던 얼굴이 나타났다. 수척해진 모습의 채영이었다. 이환은 메마른 입술을 벌렸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대신 눈에 가득 고인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환아, 정신이 들어? 정말 괜찮은 거야?"
떨리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환은 비로소 자신이 사지(死地)에서 돌아왔음을 확신했다. 안도감과 슬픔이 뒤섞인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세상의 유일한 빛인 양 그녀를 바라보았다.
퇴원하던 날, 세상은 한 달 전과 다름없이 눈부셨다. 이환은 여전히 절뚝거렸지만, 곁에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채영이가 있었다. 옷을 갈아입는 사소한 행동조차 그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깁스 때문에 비틀거리는 몸을 다정하게 부축해주는 그녀를 보며, 이환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채영아, 고마워. 정말로."
이 사고가 앗아간 것은 건강이었지만, 대신 준 것은 그녀를 향한 깊고도 절실한 사랑이었다. 그녀의 헌신적인 눈빛은 이환에게 삶을 되찾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단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병원에서 3주, 집에서의 회복 1주. 한 달이라는 시간은 상처를 흉터로 바꾸어 놓았다. 깁스는 풀었지만 어깨와 다리에는 여전히 뻐근한 통증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쉴 수는 없었다. 이환은 익숙했던 정장 셔츠를 꺼내 입었다.
거울 속의 남자는 낯설었다. 한 달 사이 야윈 얼굴과 어색하게 매어진 넥타이. 그는 억지로라도 예전의 평범한 이환으로 돌아가려 애쓰며 현관문을 나섰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마치 환영 인사처럼 따뜻했다.
'채영이가 옆에 있었다면 더 완벽했을 텐데.'
출근길, 문득 머리가 지끈거리며 짧은 현기증이 일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한 여자가 이환의 시선을 강탈했다. 처음 보는 이방인이었지만, 이환은 그녀가 들고 있는 민트색 아이스크림과 그녀의 옷차림이 기시감처럼 뇌리에 박히는 것을 느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기억의 심해에서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일렁였다. 하지만 출근 시간이 촉박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회사에서 그를 반긴 건 동기 최강호 대리였다.
"어이, 이환! 진짜 죽다 살아났다며? 얼굴 좋아졌네!" "야, 네 목소리 들으니까 진짜 돌아온 게 실감 난다."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지만, 자리에 앉자마자 기묘한 감각이 다시 그를 덮쳤다. 책상 위에 놓인 'OO 도시 이벤트 준비 현황' 서류. 분명 처음 접하는 프로젝트였으나, 서류를 넘기기도 전에 다음 장에 적힌 수치와 예상 결함이 머릿속에 영화 장면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최 대리, 이거… 내가 사고 나기 전에 검토했던 건가?" "아니, 너 입원하고 나서 새로 시작한 건데? 왜, 내용이 좀 이상해?"
등줄기에 서늘한 전율이 스쳤다. 처음 보는 정보가 이미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다니. 이환은 이것을 지독한 사고 후유증, 혹은 뇌가 만들어낸 정교한 착각이라 결론 내리려 애썼다.
퇴근길, 버스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이 낯설게 다가왔다. 집에 돌아와 무심히 켠 TV 뉴스에서는 전기차 화재 사건이 보도되고 있었다.
"세상이 흉흉하네."
TV를 끄고 침대에 누웠을 때도, 낮에 겪은 기묘한 기시감은 이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