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기 보다
가르침과 배움 사이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 끊임없이 배우고자 하는 사람이다.
두 아이를 낳으며 약 5년간 육아 휴직을 하고 나서 복직을 했다. 누군가는 그렇게 오래 쉰 뒤에 일할 수 있겠냐는 우려를 표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그토록 긴 육아휴직 후에 복직할 수 있는 직장이라 좋겠다는 부러움을 표했다. 나 역시 다시 일할 수 있을까 싶은 걱정과 다시 돌아갈 직장이 있다는 안도감을 모두 품은 채 복직을 감행했다.
오랜만에 교단에 서서 바라본 아이들은 이전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다. 내가 휴직한 5년 사이에 도대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다. 복직을 하자마자 담임을 맡은 학생 중 현우라는 아이가 유독 내 말을 무시했다. 그런 학생들이 있다. 내가 교사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 반항을 장착하고 내가 하는 말은 모조리 방패로 쳐내듯 튕겨내 버리는 유형 말이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듣지 않을, 심지어 반대로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전투력을 발산하는 학생들은 어느 학급에나 한 두명씩 있게 마련이다. 체벌이 전면 금지된 학교에서 교사들은 그런 학생들을 만나면 적당히 무시하고 피해가며 지낸다. 하지만 그 학생의 담임이 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학생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주눅들었다간 학급 전체 학생들에게 만만한 담임으로 낙인찍힌다. 그렇다고 그 학생의 공공연한 적이 되었다간 모든 학생들에게 무능력한 꼰대로 굳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교과 수업 시간에 그 학생과 문제가 생기거나, 심지어 그 학생 자체를 문제로 보는 여러 선생님이 담임교사에게 달려와 그 아이의 문제 상황을 죄다 보고한다. 마치 내가 그 아이의 엄마라도 된다는 듯이. 아니, 그 아이의 엄마조차 해결할 수 없는 문제까지 모두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듯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매일매일 쌓이는 기분이다.
현우의 행동도 동료교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도 나를 향한 재촉으로 여겨졌다. 현우는 문제아고, 주변에서는 마치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지쳐갔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아이들의 문제 행동 속에 갇혀버린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현우의 문제를 지적해 오는 여러 선생님들에게 나는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질문으로 방어막을 쳤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반응들이 쏟아졌다. 어떤 선생님들은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말로 나를 안쓰럽게 토닥여주었다. 어떤 선생님들은 나름의 경험담을 쏟아내며 다양한 기술을 전수해 주었다. 나는 애초에 내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도움을 청하면 의외로 주변의 도움을 쉽게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혼자보다 여럿이 낫다는 말이 생겨난 모양이다. 여러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천천히 학교에 적응해 나갔다. 우리 학급의 문제를 나 혼자가 아닌 여러 선생님의 지혜로 헤쳐 나갔다. 일을 하면 할수록 혼란스러웠지만, 이런 저런 문제들 속에서 동료애도 커졌고, 나 자신도 성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 뒤로 나는 한동안 착각했다. 오랜시간 교직을 떠나있었지만, 성공적으로 교직에 다시 안착했다고 여겼다. 조금씩 마음을 놓았다. 교만해졌던 건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학년 부장을 하게 됐다. 신경써야 할 아이들이 한 5배쯤 늘어났다.
“부장님!”
우리 학년 수업을 들어가시는 교과 선생님이나 여러 담임선생님들이 종종 교무실 문을 벌컥 열고 나를 부른다. 처음에는 그 부름이 나를 향한 것인 줄 몰라 깜짝 놀라거나 어색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당연한 듯 고개를 든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생겼을까.
한 학급에 있는 중증의 통합반 학생이 다른 학생들의 가슴이나 엉덩이를 만져왔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그 학급의 담임선생님은 학생들 전체를 대상으로 진술서를 받고 이 학생을 다른 학생들과 어떻게 분리시켜야 하나 고민하며 내게 왔다. 학급의 학생 여러명이 성적 수치심을 느꼈고, 통합반 선생님은 학생이 지적 능력과 사회성이 부족한 상태에서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한 행동이라고 말했다. 성적 수치심을 느낀 학생도, 친해지고 싶어서 친구들에게 신체적으로 접근한 학생도 모두 이해한다. 하지만 교사는 이해하는 선을 넘어서야 한다. 이해하고, 가르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관련된 학생들을 불러 진술서를 받으면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학생들에게 성교육 및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보다 강화하고, 통합반 학생의 학부모에게 연락해 개별화교육 시수를 늘려서 학급 내 학생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했다. 상대가 장애가 있는 학생이라 피해 입은 학생들이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문제는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고민 거리는 남는다. 이것으로 된 걸까. 빠르게 대처했다는 데 안도했으나 이것이 최선의 대책이었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보다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 교사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을까. 앞으로 똑같은 일이 반복되면 뭘 더 어떻게 해야 할까.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 학생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다.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가르칠 교육 내용보다, 학생들이 해결해 달라고 들고오는 문제 상황들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가 더 많다. 친구들 사이의 작은 다툼조차 사과를 받아달라고 교사에게 들고오는 일이 잦다. 어떤 문제들은 학부모까지 끼어들곤 한다. 문제 상황에 대해 학생과 학부모의 이야기를 꼼꼼히 듣고, 이해하고, 해결방법을 찾고, 다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가르치고 예방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가르치기보다 이해하려 하고, 들으려 하고, 해결하려고 애쓴다. 그 과정이 항상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순탄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그렇듯이 학교의 문제들 역시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는 일 투성이다. 모든 학생이나 학부모를 만족시킬 수도 없고, 교사가 언제나 완벽한 해결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완벽한 해결책을 요구받는다. 그래서 점점 더 많은 선생님들이 지쳐가고 있다. 지쳐가는 교사들을 위한 해결책은 누가 제시해 줄 수 있을까. 결국은 교사들이 또 다시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학생 부장으로서 학생들 생활지도에 여념없던 어느 날은 이불을 끌어안고 펑펑 운 일도 있다. 오전 내내 쉬는 시간마다 복도를 순회했다. 휴대전화를 내지 않은 학생을 적발해 지도했고, 쉬는 시간에 복도에서 다른 친구들을 끌고 다니며 노는 학생들이 있어 단체로 불러다 시쓰기를 시켰으며, 한 친구를 뚱뚱하다는 이유로 ‘한우정식’이라고 놀리고 키득대는 학생들이 있어 역시 불러다 진술서와 반성문을 쓰게 했다. 그러다 점심시간에 급식실에 갔다가 ‘먹고 싶은 급식 메뉴’ 게시판에서 놀라운 메모를 봤다. 오전에 내 앞에서 반성문을 쓰던 학생들이 내가 게시판 앞에 서자 서둘러 게시판 메모를 지웠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봤다.
‘00샘 인육 치킨’
학생들이 먹고 싶은 메뉴 중에 ‘00샘 인육치킨’이 있었다. 나는 게시판 앞에서 메모를 지웠던 학생들을 불러 내가 봤던 메모에 대해 물어봤다. 기억이 안 난다거나 모르겠다고 말하는 학생들에게 내가 분명히 봤으니 그 내용 그대로 정확하게 적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고 엄포를 놓았다. 학생들이 진술서에 마지못해 그 말을 그대로 적었다. 두 단어 사이에 쉼표를 찍고 강조하며 두 단어가 연관성이 없다고 변명했다. 학생들은 오전에 지도받았던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내 이름으로 ‘00샘’이라고 썼고, 유튜브 먹방 DJ 이야기를 하며 그 유튜브에서 나왔던 ‘인육 치킨’을 별 생각없이 옆에 쓴 거라고 이야기한다. 자신들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있다. 교권 침해로 신고를 한다고 해도 이 학생들은 사과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끊임없이 변명거리를 만들어 낼 것이고, 나나 다른 교사의 눈꼽만한 실수를 꼬투리잡아 오히려 교사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 반성도 없고, 교육적이지도 않은 교권침해 신고 절차 속에서 또 다시 나만 지쳐갈 것이다. 그 이후에 이 학생들과의 관계는 더더욱 악화될 것이다. 불보듯 뻔한 불지옥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정확한 진술서를 받아놓고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께 연락했다. 정작 학생 당사자들은 쏙 빠지고 서로가 미안한 어른들만 남아 어색한 대화를 하고 넘어갔다. 그 날 밤, 학생들은 나를 잘근잘근 씹어먹고 싶은가보다 생각하며 한참을 울었다. 내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이 학생들에게 나는 무엇일까. 내가 이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아니 과연 내가 뭔가를 가르칠 수는 있을까. 나의 교직 생활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자문하고 또 자문했다.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 참는 사람이다. 아프다고 외치기보다 꾹꾹 눌러 말을 고르는 사람이고, 아이처럼 울고 싶을 때에도 학생들 앞에서 어른이고자 부단히 애쓰는 사람이다. 그러다 혼자 남았을 때 종종 무너져 내린다. 그리고 나 역시 미숙한 존재임을, 여전히 삶이나 주변인들에 대해 더 많은 배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깨닫는다.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하루는 옆자리에 앉은 선생님께서 수업을 마치고 학생 두 명을 데리고 오셨다. 한 학생은 몸을 가만두지 않은 채 이리저리 흔들며 ‘왜요? 제가 여기 왜 와요? 안 떠들었다니까요.’를 반복하고 있었고, 다른 학생은 눈과 몸에 흥분을 장착하고 어디 건드리기만 해 봐라 하는 불만가득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노려보고 있었다. 수업 태도가 왜 그렇게 불량하냐는 선생님의 말에 ‘그건 선생님 생각이잖아요. 얘가 질문해서 알려준 거라니까요. 선생님이 오해한 거잖아요.’라고 대꾸한다. 선생님은 애써 감정을 누르고 야단치려는 게 아니라 대화를 하려고 부른거라고 하니 ‘대화하기 싫은데요. 내가 왜 선생님이랑 대화해야 하는데요?’ 한다. 도저히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서 ‘교무실에 와서는 목소리 낮추고 예의바른 태도로 이야기하라’고 말했더니 왜 끼어드냐고 반문한다. ‘선생님 말씀 먼저 듣고 대화를 해야지’ 하니까 자신은 ‘잘못한 게 없는데 왜 대화를 하냐’고 한다. 할말은 많지만 하지 않았다. 그래, 나도 너와 대화하기는 싫었단다. 하지만 누구든 이렇게 무례한 태도로 마주하는 건 아니지. 그 마땅한 것을 가르치고 싶었을 뿐이란다. 내게는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너에게는 그토록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안타깝지만 말이다.
급식지도를 하러 갔더니 좀 전에 내게 말대꾸하던 학생이 또 내려와 있다. 줄은 안 서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새치기하듯 급식실 들어가는 줄에 슬며시 끼어든다. 번호순으로 줄 서라고 했더니 귀를 막고 듣기 싫다는 듯 소리를 지르며 달려간다. 내 말은 안 듣겠다고 작정한 듯 했다. 하지만 여러 학생들이 있는 급식실 앞에서 너무도 제멋대로인 학생을 도저히 가만둘 수가 없었다. 이 지점에서 나 역시 평정심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그 태도가 뭐냐고 지적했더니 또 선생님이 무슨 상관이냔다. 그래, 나도 상관하기 싫다만, 그래도 명색이 교사라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질서를 잘 지키라고 한 마디 한다. 왜 자기한테만 그러냐고 한다. 지금 여기서 떼쓰고 깽판치는 건 너뿐이라 그런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래도 명색이 교사라 이를 악물고 질서를 잘 지켜야 함께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거 필요없단다. 샘이 뭘 아냐고 한다. 그래, 더이상 너에 대해 알고 싶지 않지만, 그래도 명색이 교사라 목소리 낮추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라고 또 말한다. 아이는 여전히 내 말은 듣지 않은 채, 자신을 야단쳤던 내 옆자리 선생님까지 들먹이며 다들 나한테 왜 이러냐고 흥분하기 시작한다. 다른 반 학생들이 슬금슬금 몰려든다. 내가 아무리 낮은 목소리로 말해도 아이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 나도 ‘목소리 낮추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라’고 소리를 빽 질러 버렸다. 내 말을 들었냐고, 내가 뭐라고 했냐고 묻는다. 네가 내 말을 들을 때까지 나 역시 계속 소리를 지를 거라고 경고한다. 목소리 낮추고 예의바르게 행동하라고, 질서있게 급식먹으러 가라고 계속 소리를 지르며 말한다. 내가 흥분한 듯 보이자 아이는 더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대신 한참동안 눈싸움하듯이 내 눈을 노려본다. 그런다고 내가 깨갱할 줄 아냐. 나도 같이 노려보며 내가 뭐라고 했냐고, 선생님의 지도 내용을 들었냐고 계속 묻는다. 학생은 잔뜩 씩씩대며 ‘씨X’이라고 욕을 내뱉는다.
“나한테 지금 욕한거니?”
“아, 뭐요, 혼잣말 한 건데요.”
“분명 나한테 한 것 같은데?”
“혼잣말이라고요. 에이, 씨X. 밥 안 먹어.”
아이가 급식실을 벗어나길래 나도 더이상 잡지 않고 돌아선다. 다른 선생님들이 상황을 듣고 달려온다. 일단 다른 선생님께 급식지도를 맡기고 교사 식당으로 들어간다. 기분나쁘다고, 밥맛 없다고 밥을 안 먹으면 오후 수업은 또 무슨 힘으로 하나 싶어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같은 학년 선생님이 앞에 앉아 ‘천천히 드세요. 천천히 드세요’ 한다. 덕분에 정말 천천히 꼭꼭 씹어 밥을 먹었다. 다행히 체하지는 않았다.
매일매일이 전쟁터다.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현실성이 없다고, 도대체 학교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냐고 믿어지지 않는다며 혀를 내두른다. 그래, 그렇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들 앞에 앉아 마음을 가라앉히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마음을 꼭꼭 씹어 가라앉히면 조금은 밥이 넘어간다. 그렇게 동료 선생님들 사이에서 천천히 밥을 먹고 나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우리의 현실과 아픔을 아는 것은 우리 뿐이므로.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기보다 그저 함께하는 사람이다. 미숙한 학생들과 함께하는 어른이고, 직장에서 함께하는 동료다. 그 안에서 모범적인 어른이고자 노력하고, 친절한 동료이고자 애쓰며 살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렇게 서로 함께하는 것임을 학생들에게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함께하는 사람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기를, 함께하는 사람에게 좀 더 친절하고 예의바르게 대하기를, 그런 것들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그런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는 교사이고 싶다. 삶에 대해, 그리고 인간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더 배워야 그런 교사가 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