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라는 이름으로 덮어놓고 반복하는 일은
내게 사랑보다 의문을 낳는다.
정신없이 하루를 지내고 나면 머릿속이 하얘지는 순간이 온다. 오늘 분명 나는 바쁜 와중에도 여러번 의문을 품었고 그 의문이 울분이 되었으며, 결국에는 울화가 치미는 경험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문의 실체가 무엇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자주 울컥하지만 차마 그 울컥임을 속 시원하게 쏟아내지 못한다. 내 머리를 스쳐간 수많은 의문들이 자꾸만 허공에서 흩어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것은 결코 허공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울컥임이 뼈에 사무치던 순간들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도 막상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써보자고 모니터 앞에 앉으면 오히려 아무것도 써지지 않는다. 그저 막막해진다. 삶이란 것이 늘 그렇듯이 본질은 어딘가로 가라앉아버리고 의미없는 껍데기들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듯한 형국이다.
울컥이던 의문들이 사라진 머릿속으로 의무들만이 사정없이 굴러 떨어진다. 그러고보니 내가 지금 이러고 앉아있을 때가 아니다. 휴대폰에는 세탁기가 자신의 임무를 완료했다고 알림을 보내고 있다. 지금 나는 세탁이 완료된 세탁물들을 건조기로 옮겨야 하고, 일요일 온 가족의 세끼를 오롯이 책임져야 하며, 내일부터 시작될 한 주간의 일정을 나와 아이들 몫까지 3인분 어치 준비해야 한다. 워킹맘의 주말은 휴식이 아니라 한 주동안 미뤄둔 집안일과 다가올 한 주를 위한 준비로 점철된다. 그나마 남편이 자신이 해야할 일만큼을 스스로 챙겨주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이렇게 살다보면 내가 해야할, 혹은 해야만 할 것 같은 일들에 치여 하고 싶은 일들은 자꾸만 미뤄진다. 그리고 점차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조차 희미해진다. 내가 좀 전에 울컥했던 의문들조차 새하얗게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먹고 치우는 일, 업무를 해 치우는 일, 하루하루를 무사히 넘겨 치우는 일만으로 내 삶이 얇게 저며지는 느낌이다.
‘사랑으로 내게 주어진 일을 감당하자’고 생각했으나 사랑은 생각보다 어려웠고, 말 그대로 생각으로만 그쳤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게 주어진 일을 하자’고 생각했으나 그조차 체화되지 못했다. 그저 해야하니까 이를 악물고 했다. 사랑조차 의무가 되어 가는 듯 했다. 하지만 의무가 된 사랑은 그것 자체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돈 버는 일은 ‘돈이 되니까’ 라는 생각으로 차라리 참을 수 있었다.
집안일을 여느 공장의 작업대처럼 컨베이어 벨트 위에 순서대로 올려놓을 수는 없는 걸까, 왜 해도 티 안나는 수많은 일들이 계속 내 손끝을 맴도는 걸까. 늘 뭔가를 하고 있는데 왜 자꾸만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을까, 왜 내 앞에는 차근차근 하나씩 순서대로가 아니고 한꺼번에 빨리 해치워야 할 일들이 자꾸만 닥쳐오는 걸까, 이런 삶이 괴로운 건 나 혼자만일까. 내가 모성애가 부족한가, 왜 나는 내 아이들이 마냥 사랑스럽지 않은 걸까, 나는 왜 이토록 속물인걸까.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 나만 이렇게 어려운 걸까. 이런 질문들이 어느 순간엔 또 다른 방식으로 바뀌어 울분으로 쌓인다.
왜 네 밥을 내가 해다 바쳐야 하는가, 왜 네 잘못으로 일으킨 문제를 내가 해결해 줘야 하는가, 왜 나는 퇴근하고 나서 집으로 다시 출근해야 하는가, 왜 내 시간은 오롯이 내 것이 될 수 없는가, 내가 벌어 산 내 집 안에 나만을 위한 공간이 이렇게 없을 수 있는가, 등등. 너무 당연해서, 혹은 너무 흔해 빠져서, 혹은 해봤자 답이 없어서, 혹은 다들 그렇게 사니까 이 모든 울분은 밖으로 쏟아지지 못하고 울화가 되어 울컥인다. 그걸 자꾸 누르고 누르며 살려니 너무 큰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그 수많은 의문들을 자꾸만 지우고 만다. 그저 덮어놓고 눈 앞에 닥치는 일을 해치우는 데 집중한다. 매일매일 해야하는 일들을 의무라는 이름으로 생각없이 반복한다. 그게 편하니까. 그래야 꾸역꾸역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수많은 돌봄 노동자가 그럴 것이다. 다른 이를 돌보다보면, 나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로 하루를 보내다 보면, 입밖으로 삐죽삐죽 튀어 나오는 울컥임을 우물우물 삼키게 된다. 그것은 돌봄노동자로서 누군가를 정성껏 돌봐야한다는 관습적 도덕성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일을 묵묵하고 충실하게 수행해 온, 지금까지 몸에 밴 습관에 기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울컥할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하나라도 해치워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조급함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든 당장 해야할 일들에 솟아난 울분을 희미하게 지워 버리는 때가 허다하다. 그러다보면 수많은 의문들은 지워지고, 응당 감당해야 할 의무들이 그 자리를 채운다. 의문은 사라지고 의무만이 들어차는 일상의 연속. 그런 일상 속에서 사유는 사치다. 어느새 내 생각도, 나 자신조차도 희미해지곤 한다. 그런 삶의 방식이 때때로 내 삶을 살아가는 임시방편이 되기도 한다.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의무 속에서 해도해도 끝이 없는 의문들은 나를 지치게 할 뿐이니까.
그러나 삼키고 지운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나탈리 골드버그는 ‘뼈속까지 내려가 쓰라’ 고 했으나, 내 뼈 속에는 글이 아니라 글이 되지 못한 의문들이 가득하다. 뼈에 사무치게 새겨두고 꾹꾹 눌러두었더니 어느새 내 머릿 속에서는 지워져 버리고, 수시로 찌릿하는 관절염처럼 뼈 마디마디에 새겨져 버렸다.
학기말이다. 학기말 시험과 수행평가, 생활기록부 업무를 해야하는 바쁜 시기다. 학생들의 수행평가 점수를 알려주며 수많은 감점 요인들을 나열했다. 분량을 채우지 못한 경우, 맞춤법이 맞지 않거나 비문이 있는 경우, 글의 통일성을 갖추지 못한 경우, 토의토론 과제의 질문에 모두 답하지 않았거나 단답형으로만 답한 경우 등등. 그 모든 경우에 너희들은 감점을 당한다고 선언한다. 수많은 감점 요인은 학생들의 입장에서 자신이 해내야 할 의무, 혹은 도달해야 할 목표쯤으로 치환될 것이다. 그런 의무의 나열 속에서 내가 왜 이 점수를 받아야 하는지, 내가 뭘 잘못했고, 뭘 더 해야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묻혀 버린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으나 너무나도 단순한 숫자로 바뀌어버린 자신의 수행에 대한 평가치는 모든 의문을 삼켜버린다. 아이들은 그 숫자를 보며 질문을 할 생각도, 의문을 품을 생각도 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다 하지 못한 의무와 미처 다다르지 못한 허공같은 목표만이 덩그러니 남아 자기 스스로를 탓할 뿐이다. 그 허탈함 속에서 학생들은 내가 일방적으로 부여한 점수를 받고 수긍한다. 그리고 그 점수를 받아들이는 사인을 하고 만다. 모두에게 만족할만한 점수를 주지도 못했고, 줄 수도 없는 나 역시 씁쓸한 기분으로 정신없이 수행 평가 업무를 해치운다.
돌봄이라는 이름으로 엄마와 교사로 살고 있으나 나는 끊임없이 나 스스로의 의문을 지우고, 아이들의 의문을 막고 서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오늘 하루 나는 얼마나 의문을 품고, 아이들에게 얼마나 질문할 기회를 주었는가. 이런 의문조차도 자문할 시간없이 정신없는 의무만이 가득한 하루를 보내지는 않았는가. 나의 돌봄은 나 자신뿐 아니라 내 아이나 학생들에게조차 의무만을 지우는 행위는 아니었는지, 나라는 부족한 존재로 인해 아이들은 진정한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질문한다. 또 다시 여러 의문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아이들이 잠들고, 비로소 나라는 존재를 오롯이 바라볼 시간이 주어지면, 나는 나를 해부한다. 살과 피를 걷어내고 내 뼛속에 들어찬 의문들을 마주한다. 솔직히 말하면 두렵다. 내 안에 새겨진 수많은 의문들이 지금의 내 삶을 휘저어 놓을까봐, 나 스스로 내 삶을 한심하게든 불쌍하게든 동정하게 될까 봐, 무엇이든 정답을 내 놓으라고 스스로를 닦달하게 될까봐.
의무감은 사랑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사랑 때문에 의무감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오랜 시간 의무와 사랑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여전히 속시원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왜 여전히 변함없는 의무 속에서 나 자신에게 사랑을 강요하며 살고 있는가’ 의문하며 산다. 결국 삶이란 하루하루 의문의 연속이다. 내 앞에 닥쳐오는 수많은 일들과 내 몫으로 남겨진 여러 문제들에 대해 나는 매일 자문한다. 오히려 그 의문들이 나를 하루하루 살게 한다. 아무 생각없이 해야할 일들을 반복하기만 하면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뼛속까지 내려가 그 속에 들어찬 의문들을 계속 끄집어내 들어주어야겠다. 때때로 어떤 의문들은 여전히 뼈에 사무친다. 그리고 어떤 의문들은 내 안에 이런 말들이 숨어있었구나 싶어 우습기도 하고, 또 조금은 달콤하기까지도 하다. 당시에는 그토록 사무치던 의문들이 이렇게 잊혀질 수도 있구나 싶어 놀라운 의문들도 있다. 마주할 수 있을 때 마주해 보자. 아무도 없는 한 밤중, 뼈만 남은 내가 내 안에서 매혹적인 춤을 시작하고 있으므로.
삶과 죽음이 어우러지고
비애와 환희가 어우러지고
번잡과 고독이 어우러지는
이토록 아름다운 춤판 한가운데
내가 휘청이며 추는 것이 춤인 줄도 모른 채
빙글빙글 돌아가는 리듬에 맞춰
매일매일 지독하게 반복하는 춤
골수가 외치는 차가운 이야기들
뼈에 사무친 아픈 속삭임들
살로 덮고 피로 덥혀서 달래어 놓고
덮어놓고 추는 무아지경의 춤판
이제는 내가 아니라 춤이 나를 춘다
춤이 나를 추고 또 춘다
나의 춤은 이제 춤이 아니라 의무다
어떤 몸짓은 몸짓을 낳고 또 낳고 또 낳으며
당연한 몸짓을 끌고 나온다. 끌어 당긴다.
언제나 춤을 추며 살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이미 삶이란 춤판의 연속이었다.
어느 누군들 춤추듯이 살고 싶지 않겠는가.
모든 삶은 우리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무수한 춤의 연속이다.
의뭉스럽게 감쳐두었던 의문들이
유령처럼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이 지독한 춤판 한가운데,
자신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당당하게 외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