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울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고, 우리 모두는 그 괴로움을 기꺼이 배울 수 있어야 한다.
공황장애. 한 아이가 격한 호흡을 몰아쉬며 호흡 곤란을 호소한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숨이 넘어갈 듯 몰아치는 호흡소리를 들으며 나는 급하게 의자를 모아 넓은 자리를 마련하고 따뜻한 물을 따라왔다. 아이는 가까스로 자리를 잡고 고개를 숙여 숨을 고른다. 한참동안 불규칙하게 몰아쉬던 숨소리가 조금은 잦아드는 것 같다.
요즘 학교에는 공황장애를 호소하는 학생들이 종종 있다. 수업 시간에 갑작스럽게 의자 밑으로 쓰러지거나 격하게 숨을 몰아쉬며 울기도 한다. 수업 상황이 때떄로 아이들에게 견디기 힘든 압박으로 느껴지곤 하나보다. 나 나름대로 그런가보다 추측하긴 하지만 그 아이들을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도대체 무엇이 그토록 힘들고 괴로울까.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수업과 학교 생활 속에서 그 무엇이 그 순간 그 아이를 조여온 것일까.
그렇게 생각을 뻗어가다가 문득 흠칫한다. 나 역시 누군가의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괴로울 자격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괴로워하는 데에도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괴로워할 자격이 없는 사람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 괴롭냐는 반문을 듣는다. 괴로워하기도 힘겨운 시기에 그런 질문들은 사람을 더욱 더 절망 속으로 밀어넣는다. 그래서 나 역시 때때로 혼자 괴롭고 만다. 괴롭고 외롭고 슬프다고 혼자서만 되뇌이고 만다. 때때로 어떤 이들에게는 힘들다는 말을 할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기에. 누군가에게는 배부른 투정으로 보일테고, 또 누군가에게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일 것이기에.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남편과 2살 터울의 남매, 5년 가까이 휴직을 하고도 돌아갈 수 있는 직장, 가까이 사는 친정. 이 모든 조건을 갖춘 나 역시 괴로울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아니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을 쉽게 내뱉을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하는 힘들다, 괴롭다는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단순한 투정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나는 계속 힘들고 괴로웠다. 힘들고 괴로울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기에, 밖으로 표출될 수 없는 그 괴로움은 내 안에서만 자꾸 몸집을 키워갔다.
괴롭다고 말하려면 도대체 어떤 자격이 필요한 걸까. 둘이서 아무리 벌어도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씀씀이는 계속 늘어났고 경제적 여유는 언제나 요원했다. 발달이 늦은 아이는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여전히 또래보다 더 많은 돌봄이 필요하고, 한참동안 휴직을 하고 돌아간 직장에서는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여차하면 손을 뻗을 수 있을 것 같은 친정 부모님께는 늘 죄송했고, 때때로 아이를 맡기고 나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번은 시간이 늦어 급하게 달려갔더니 친정 아버지는 빈 손으로 왔냐는 뼈있는 농담을 건넸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친정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일도 순간순간 멈칫하게 됐다. 아이들 방학 때에는 일을 하다가 잠깐 외출해 후다닥 점심만 차려주고 바로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가는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내가 낳은 아이는 온전히 내 책임이다. 그 당연한 책임을 온전히 내 힘으로 해내는 일이 참으로 버거웠다. 나는 늘 하루하루의 웅덩이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애를 쓰면 쓸수록 웅덩이에서 빠져나오기는 커녕 웅덩이는 내 발 밑에서 자꾸만 더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40대가 되면서 삶의 추수기라는 말들을 여기저기에서 많이 듣는다. 하루하루 바쁘게 살았는데 이제 와서 돌아보니 내 손에 쥔 건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함을 지인에게 토로했다가 돌아오는 말에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왜? 너 손에 쥔 거 많잖아.”
곰곰히 생각했다. 남들이 보기에 많이 쥔 것 같은 나는 왜 이렇게 힘들고 괴로울까. 이제서야 내 고민을 시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적당한 나이에 취업 고민, 결혼 고민, 그리고 출산과 육아에 대한 고민을 해 왔다. 나 자신에 의해서건, 부모나 사회에 의해서건 응당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나이에, 혹은 그 다음에 순차적으로 해야 할 고민들을 차곡차곡 받아들이면서 하나하나 헤쳐왔다. 과제를 해치우듯이 착실하게 순서대로 단계를 밟아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수많은 고민들 속에 진짜 내 고민은 무엇이었는가. 나만의 고민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치열하게 생각하고 싸워왔는가 자문한다. 외부에서 주입된, 이 나이에 해야할 것 같은 사회.문화적인 고민 외에 진짜 나의 정체성과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던가. 이 순간 정말 내가 해야 할 일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생략한 채로 이 나이에 해야하는, 혹은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우선적으로 해치우며 살아온 건 아닐까. 그래서 매일 바쁘게 살면서도 남는 것 없이 계속 웅덩이 속을 허우적대는 기분으로 힘들고 괴롭다고 투정만 부리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 인생은 과거에도, 지금도, 이대로 산다면 앞으로도 수많은 과제의 연속일 뿐이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모범생처럼 그 날 그 날의 과제를 착실하게 해 왔듯이 나는 앞으로도 매순간의 과제를 착실하게 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 주변인들은 내가 아무 걱정없이 잘 살아간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걸로 되는 걸까.
나는 나만의 시간과 공간이 없는 삶이 괴롭다. 교실에서도 집에서도 나는 언제나 어른스러워야 하고, 끊임없이 누군가를 돌보고 책임져야 하는 삶이 괴로워 죽겠다. 내가 나 스스로를 살피고 돌볼 수 없는 상황이 너무나 힘들다. 이 말을 마음껏 할 수 없어서 더 괴롭다.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만 들으면 심장이 뛰고 숨이 멎을 것 같다는 신규교사를 만난 적이 있다. 쉬는 시간에 복도로 쏟아져 나와 온갖 욕설과 소음을 만들어내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공포스럽다고 했다. 학생들의 거친 말투를 들으며 ‘왜 저럴까, 애들이 다 그렇지’ 하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나는 그 말들을 예민하게 듣고 고민하는 한 선생님의 괴로움에 대해 배웠다. 어떤 영양교사는 급식실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무섭다고 했다. 나이 어리고 경험없는 영양교사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조리실 내 텃세와 음식 하나하나를 품평해대는 학교구성원들의 온갖 말들이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나는 한 학교에서 똑같이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일하는 교사가 나와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누구나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 사회가 그들의 괴로움을 학습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난 선생님들은 그 정도는 버텨내야 한다는 주변의 암묵적인 압박이나 현재 상황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쉽게 괴로움을 표현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나 괴로울 자격이 있다. 그리고 괴롭다고 말할 자격이 있다. 예전에 광화문에 갔을 때 세월호 진상조사를 요구하는 천막 앞에서 ‘지겹다’는 말이 가득 적힌 현수막을 들고 항의하던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사회적 문제로 인해 괴로움을 겪은 사람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말하는 것조차 ‘지겹다’고 응수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쉽게 괴로움을 이야기하기 힘들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한 선수가 부상을 당하고 외로운 싸움을 할 때 협회의 도움을 제대로 받지 못해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그 선수를 탓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선수가 금메달을 따서 이렇게 괴로움을 토로할 수 있게 된 것만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올림픽 메달이 그 선수에게는 최소한의 ‘괴로울 자격’을 부여해 준 것이 아닐까. 그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괴롭다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이나 주목받지 못한 수많은 선수들이 괴롭다는 말조차 못 한 채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 안타깝기도 했다. 나는 그 선수의 발언을 응원한다. 그 선수가 ‘괴롭다’고 말해준 덕분에 그 선수를 비롯한 수많은 선수들이 괴로워하고 있음을 우리 모두가 배웠다.
공황장애 증상으로 보건실로 보냈던 학생이 나아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다행이다 싶었다. 말로 못 하니 몸이라도 괴롭다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힘드냐고 물으면 그 학생은 뭐라고 대답할까.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또 다시 공황장애 증상이 터져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본인조차 자신이 삼키고 삼킨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혼란스러워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일을 통해, 그 학생이 최소한 자신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과 무엇이 괴로운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점만큼은 깨달았으면 좋겠다. 자신이 왜 학교에서 숨을 쉬기 힘든지, 무엇이 자신의 몸을 그렇게 옥죄는지 스스로 들여다 보고 말로 표현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그 학생이 공황장애를 이겨내겠다고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공황장애 증상에 제대로 귀를 기울여주었으면 좋겠다.
괴로울 자격은 누구에게나 있다. 우리 모두는 충분히 괴로워할 자격이 있다. 괴로울 자격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쉽게 자신의 괴로움을 표현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서로의 괴로움에 대해 배울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