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비를 생각해 본다. 어릴 적 도화지에 비를 그린 기억을 꺼내본다. 지금이라면 축축한 골판지를 준비했겠고, 회색빛 습기들을 뿌리겠지만, 그때의 비는 이랬을 것이다. 하얀 도화지에, 거리를 씻기며 데려가는 검은 모래알갱이도 없을 테고, 벽에 기대어 흐르는 굼벵이 모습의 물방울도 없겠다. 예상하지 못해 머리 위에 손을 올린 채로 뛰어가는 사람의 분주함도 없고, 우산을 들고 오는 사람의 기다림도 없다. 비 사이로 흘러 구겨져 나오는
발라드음악의 끊기듯 나오는 고백도 들리지 않는다. 옥상에서 지지직거리는 주파를 맞추려 안테나를 만지며 누군가에게 확인을 요청하는 아버지의 외침도 없다. 빨간 우체통에 맺힌 물방울을 훔치며, 편지를 보내는 팔도 보이지 않는다. 투명우산 위로 떨어지는 비와 눈을 마주치려는 사람의 발걸음도 없다. 버스 바퀴에 팅기는
고인 물의 찰박임이 없고, 찰박임을 쏜살같이 피하는 꼬마아이의 귀여움이 없다. 골목 구석 떨어질듯한 우산 속의 키스하는 연인이 없고, 너무 마셔버린 낮술에 고개를 떨군 남자의 구토도 없다. 파라솔 안으로 모여든 쭈그리고 앉은 아이들의 재미있음이 없고, 열심히 비를 흘리는 우수관의 열정이 보이지 않는다. 골목 곳곳에 낮게 파여 모여든 빗방울들의 재회가 없으며, 한 곳으로 흐르는 이별이 없다. 어릴 적에 나의 도화지속의 비 오는 날은 태양도 밝게 빛나고 있었고, 사람들은 멈춰있듯 걷고 있다. 눈은 손톱달처럼 웃고 있고, 우산은 장난감 같다. 비는 마음먹으면 피할 정도로 단순하게 생긴 하나의 막대기다. 막대기를 열심히 그어대고 그어댄 순수한 비가 도화지 속의 골목을 채웠다. 새하얀 공기가 막대기를 품에 안고 땅바닥에 얌전히 내려놓는다. 비를 잉태하지 않고도 쏟은 그 막대기들이 어른이 되며 잘게 부서진다. 습기는 차오르고, 비와 상관없는 감정의 늪으로 빠진다. 추억에 비를 품고, 비를 피해 술집으로 들어가 소주잔을 든다. 온 세상에 막대기의 잔해가 숨을 쉰다.
아이를 기다리는 우산을 든 엄마의 손끝에 비가 반짝이고, 정이 물들었다. 추억이 부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