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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연의 Nov 27. 2021

좋은 라떼, 나쁜 라떼

기업문화가 진화하려면

친한 선배랑 밥먹다 이런 얘기가 나왔다. 

"라떼(나때)가 많아지면 좋은 거 아니야? 그만큼 기업문화가 좋아졌다는 거잖아!"

"오! 신선한 발상이네요. ㅎㅎㅎ" 하며 한참을 웃고보니 정말 그렇다. 나 때는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 때는 맨날 새벽에 나와서 회의했어, 나 때는 재떨이가 날아다녔다구..! 그런 말들을 들으면 젊은 친구들은 아우 꼰대들. 하며 욕하겠지만, 그렇게 엉망진창이었던 회사가 조금씩 나아지고, 좋아지고, 젠틀해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히 칭찬할 만 한 일이다. 실제로 어떤 이유에서든 회사가 직원들 입장에서 생각하기 시작하고, 직원들의 의견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기업문화팀이 생기기도 했으니까. 

라떼가 꼴불견인 이유는, 기승전 자기자랑이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정말 상황이 좋지 않았고, 지금처럼 제도나 기반시설이 잘 되어있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 해냈다는 얘기가 결국 주제다. 억지로 앞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있어야 하는 후배들에게 그건 폭력이다. 당연히 귀를 막고 도망가고 싶다. 

같은 '나때'를 외치더라도, 기승전 자기자랑이 아니면? 과거에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지금은 당연하지 않고, 무조건 희생하고 강요했던 것들이 지금은 개개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쪽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부분에 포커스를 둔다면, 분위기가 좀 달라질 것 같다.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이러하니 더 좋다, 또는 노력하겠다, 또는 잘 해보자는 것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수 있다. 지금 자기가 겪는 상황이 전부라 믿고 힘들어 하는 후배들에게는, 과거로부터 조금씩이나마 개선되어왔던 부분을 이야기해주고, 앞으로도 점점 나아질거라고 격려해주는 선배가 더 힘이 되고 고마울 것이다. 

자기자랑이 아닌 '라떼'는 기업문화가 좋아지고 있다는 고마운 반증이다. 사실 기업문화의 좋고 나쁨에 대한 평가는 한 두 사람이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특정 사례만으로 결론짓기도 어렵다. 어떤 수준이 좋은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경험치에 따라 느끼는 좋고 나쁨의 수준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무조건 수평적 소통이 좋은 것이다, 회식은 무조건 나쁜 것이다 말할 수 없다. 설사 좋고 나쁨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하더라도 거기서 끝이다. '그래서 뭐?' 하는 순간 한숨 섞인 푸념으로 이어지거나 '그냥 그렇다고'로 끝난다. 

하지만 '좋아지고 있다, 나빠지고 있다'는 말은 조금 다르다. 물론 그것 역시 주관적인 판단이다. 그런데 밑도끝도 없이 좋아지고 있다, 나빠지고 있다는 게 아니라, 과거에는 어땠는데 지금은 뭐가 달라졌고, 예전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지금은 이러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나누는 건 꽤 의미가 있다. 주관적인 생각이 모이더라도 방향성과 연속성을 가지면 그 다음을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되어가야 하는지, 지금의 할 일은 무엇인지, 같이 고민해 볼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의 라떼라면, 귀 기울여 볼만 하다.

MZ세대들은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과거야 어떠했든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문화가 좋은지 나쁜지만 중요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들은 판단이 빠르고, 실행도 빠르다. 회사의 문화가 자기랑 안 맞는 것 같으면 금방 다른 회사로 가 버린다. 그들에게 예전 기업문화가 어땠고, 지금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 설명 따위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하지만 회사에는 MZ세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10년, 20년, 꽤 오랜시간 회사에 몸담고 성과를 내기 위해 힘써 온 중간관리자 이상의 사람들도 '좋은 기업문화' 속에서 일하고 싶은 건 똑같다. 다만 그들은 시대에 맞게 기업문화를 개선시켜 나가야 할 책임도 함께 지고 있을 뿐이다. 그 책임을 실현하는 방법은 '건전한 라떼의 남발'이다. 자기자랑이 아닌 라떼, 우리가 함께 몸 담고 있는 조직의 진화를 위한 진정성 있는 라떼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변화의 동인은 문제의식이다. '나 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시대가 다르니 달라져야만 한다'는 문제의식이, 건전한 방향으로의 변화를 낳을 수 있다. 자기자랑으로 점철된 '라떼'는 문제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가 많았음에도 나는 잘 했었으니, 너희들도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하라는 강요와 압박이다. 시대에 맞는 건강한 기업문화의 개선을 위해서는, 건전한 '나 때'가 필요하다. 

후배들의 귀를 막지 말고, 격려할 수 있는 '라떼', 요즘세대, MZ세대 운운하지 말고, 앞장서서 바꿔가려는 멋진 '라떼'가 많아지면 좋겠다. 물론 나부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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