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아 있든 서 있든 항상 자세가 좋지 않은 나는 몸 곳곳의 통증을 자주 호소하는 편이다. 심할 때는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나 도수치료를 받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검색을 통해 마사지 방법을 알아낸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몸의 어디가 아픈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신체 부위 명칭. 이것을 여러 번 입력하고 여러 사진을 훑어보는 동안 알게 된 것인데―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다양한 분야에서 인간의 신체를 탐구하고 있었다. 어제 대학교 동기와 술을 한바탕 마신 나는, 지금 왼쪽 팔오금이 아프다. 나에게 “팔오금”이 무엇인지 알려준 것은 어느 곡궁 전문가의 블로그였다. 활쏘기를 배우거나 혹은 가르치는 데 있어 몸, 그중에서도 팔과 손의 신체 부위 명칭을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고 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방학 계획을 세우고 지키지 않는다. 여름 방학이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고 나는 운동을 전혀 하고 있지 않다. 나라고 학생이 아닌 건 아니니까. 2시간 간격으로 가끔 목을 돌려주고 안약을 넣고 출퇴근하고 주기적으로 숨을 쉬어주는 것이 내 움직임의 전부이다. 헬스장이나 피트니스 센터, 수영장이나 운동장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아니다. 운동장은 가끔 볼 수도 있겠다. 내 침대 옆에 있는 큰 창문을 열면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이니까. 방학 전까지는 점심시간만 되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이제는 조용하다.
그리고 지난 겨울 방학에 초등학생처럼 천변 밑 산책로를 열심히 뛰어다녔다. 정말 열심히 뛰었다. 너무 열심히 뛰어서 한동안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만큼. 단 하루. 그날 처음 느꼈다. 난 내 몸의 주권을 23년간 단 한 번도 갖지 못했다는 것을. 쓰는 법을 알 것 같으면 언제나 금방 놓쳤기에. 핑계처럼 들릴지 몰라도 나는 그래서 춤도 못 춘다. 내 몸의 어느 부분을 움직여야 할지 잘 모르니까. 움직여야 하는 곳의 이름도 모르니까!
초등학교 5학년이었을 때, 점심시간마다 젓가락을 올바르게 쥐고 콩을 옮기는 연습을 했다. 콩을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잘 옮긴다고 칭찬을 들었었다. 그러나 당시 내 옆에 앉아 있던 짝꿍은 이상하게 콩을 옮겼다. 화살촉처럼 젓가락으로 콩의 중심부를 꿰뚫고 그 상태로 들어 날랐다. 내가 아무리 침착하게 콩을 옮겨도 그 친구의 속도는 따라갈 수 없었다. 마음이 급해지면 콩을 놓치기 일쑤였다.
기시감과 미시감이라는 단어가 있다. 기시감이라는 단어에는 기시감이 느껴진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기시감은 너무 많이 사용한 단어라서. 미시감이라는 단어에는 미시감이 느껴진다. 미시감은 자주 사용하지 않은 단어라서. 나는 내 몸에 기시감을 느낀 순간이 없는 것 같다. 익숙해질 틈 없이 나빠지고 아픈 것 같아서. 아픈 쪽으로 향하게 내버려둔 것 같아서. 손에서 놓아버린 것 같아서. 과녁을 향해 이미 날려진 활처럼. 그래도 요즘엔 이름이라도 익히려 노력하는 중이지만.
사실 몸 말고 표정에 대한 이야기가 더 하고 싶다. 몸은 미시감이라도 느낄 수 있지만, 인간은 다른 이를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표정을 알 수 없으니까. 어떤 종류인 것과는 상관없이, 카메라에는 항상 왜곡이 생긴다. 카메라가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나’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바라볼 때의 자신의 표정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평생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사람들을 마주하겠지. 그건 연습조차도 불가능할 것이다.
내 침대 옆 큰 창문을 열면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였다. 나는 혹여나 아이들과 눈을 마주칠세라 머리만 빼꼼 올려서 쳐다보았다. 사실은 눈이 마주쳐도 별일은 없을 텐데. 그런데 창문 앞에 서 있으면 그냥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괜히 눈을 돌리고 의식하지 않으려는 척. 누군가가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도 아닌데. 모두 집에 돌아가서 여름을 만끽하는 이 시기, 아무도 뛰어다니지 않는 운동장을 볼 때면 가끔 나는 시위에 걸려 날아갈 준비를 급하게 하는 화살이 된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