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첫 그룹 과외 시간이 있었다. 과외를 받은 이후로는 파란 것들이 전부 하늘로 보인다. 처음에는 공사장에 덮여 있는 파란 천막이 하늘이었는데 이제는 다음 날 입으려고 미리 꺼내둔 청바지까지 하늘로 보일 지경이다. 파란 것은 하늘이라는데. 서울에는 며칠간 폭우가 쏟아졌다. 바지 끝단이 전부 빗물에 젖어서 질척였고 무거웠다. 빗속에선 그 사실을 전혀 알아차릴 수 없어서, 집에 들어가고 나서야 흠뻑 물먹은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를 숨기려면 빗속에 숨길 것. 하늘을 숨기려면 하늘 속에 숨길 것. 이 비밀들을 숨기기 위한 위증은 8월 12일 오늘, 비가 그치면서 함께 사라졌다.
하나의 은하에는 몇천억 개의 별이 있대. 빛나는 별은 타고 있는 것이고, 타고 있는 별은 소멸되는 중이래. 그러나 별은 빛을 잃고서도 검은 천체의 형태로 살아남는다는데 그렇게 살아남은 별에게 있어서 빛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지. 『하늘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가진 책은 하늘보다 하늘의 비밀에 대해서 알려주는 책이다. 그러면 지금 나는, 내가 아니라 나의 비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걸까. 공사장에 덮여 있는 파란 천막들을 한 겹씩 벗겨내고 있는 걸까.
사람들은 진심을 담아 이야기할 때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비밀과 별과 빛과 에테르와 영혼. 이것들은 전부 만질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나는 똑같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이것들은 말로도 쉽게 휘두를 수도 없고. 뜨겁고 차갑고 무겁고 가볍고 맹렬하고 흐리고. 아인슈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린 에테르보다, 나는 영혼의 실재를 더 믿을 수 없다.
어느 문화권에서는 결혼을 앞두고 죽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영혼결혼식을 한다. 북유럽 신화에서 발키리들은 죽은 자의 영혼을 회수해서 발할라로 돌아간다. 만화책에서 흔히 충격받은 모습의 캐릭터를 그릴 때 입 밖으로 영혼이 빠져나가는 듯한 묘사를 한다. 사람이 죽는 순간에 무게를 재면 21그램이 줄어든다는 말도 있지. 그게 영혼의 무게라고.
살아 있을 때는 전혀 알아차릴 수 없는 무게라면, 시체가 되고 나서야 시체 속에서 영혼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영혼은 비밀스럽다. 빛은 붉은 것보다 푸른 것이 더 뜨겁다. 라이터를 켜면 불의 진원지가 가장 파랗고 중심에서 벗어날수록 빛은 붉어진다. 비밀이 아니게 될수록 더 차가워진다. 영혼은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이므로 분명 뜨겁고 파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썼다. 비밀과 별과 빛과 에테르와 영혼은 똑같다고.
아무리 나의 비밀에 대해 말해도 열기가 가라앉는 것 같지 않다. 비밀을 숨기려면 비밀 속에 숨길 것. 나를 숨기려면 나 속에 숨길 것. 어떤 비는 우산을 써도 안쪽까지 들어온다. 비는 차갑고 서늘한데 비에 젖으면 하나도 안 그래. 빗속에서 타오르는 별이 된 것 같다. 파란 것은 뜨겁다는데. 파란 것은 하늘이라는데.
8월 12일 오늘은 어제 꺼내둔 청바지를 입었고, 최근에 산 찢어진 청바지였고, 바지에 다리를 집어넣다가 구멍에 걸려서 구멍이 더 커졌고, 구멍이 더 커진, 땅 쪽으로 더 치우쳐진, 무너진 바지를 입었다. 걸을 때마다 찢어진 자리에 바람이 살결을 파고든다. 덥고 습하다. 무른 과일이 된 것 같다. 비밀은 검은 씨앗의 형태로 단단하게 조용히.
비밀은 또 다른 비밀을 낳고 비밀을 모르는 사람들은 과육만 먹고 버린다. 버려진 씨앗에는 벌레들이 천천히 꼬인다. 공사장에서 지어지고 있는 건물. 날마다 파란 천막의 수위는 높아진다. 파란 천막은 큰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그 아래, 제자리에 서있는다. 가만히 서 있어도 계절은 지나간다. 그림자 아래에 가만히 서있어도 그림자는 사라진다. 건물은 부서진다. 나뭇잎은 떨어진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도 빛은 언젠가 나를 꼭 지나간다는 것이다. 빛은 기어코 나를 밝혀낸다.
생각해보면 빛이 차갑다고 느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오늘 하늘은 며칠 전 비가 내릴 때보다 한참 더 파랗다. 매미의 수가 많이 줄었는지 바깥이 조용하다. 매미의 발성기관은 꼭 21그램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