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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anni Oct 31. 2022

<작별하지 않는다>를 세 번 연속 읽은 까닭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깨닫게 된 순간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지하철에서 당황한 적이 있다. 이것이 제주의 이야기이고, 엄마의 이야기이고, 내 엄마의 엄마의 이야기임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나는 태아일 때 제주에 가서 제주에서 태어나 한 달째 되는 날 육지로 돌아왔다. 엄마의 친정이 제주인 탓이다. 이후로도 일 년에 최소 한 번은 외할머니를 뵈러 제주에 갔고, 외갓집 근처에는 4.3 평화공원이 있었다.  그런 내게 이 책은 충격과 부끄러움과 성찰의 연속이었다.


마침 몇 년 만의 제주 방문을 앞두고 있던 터라 그전에 이 책을 제대로 읽고 이해하고 알고 싶었고, 그것이 내가 이 책을 세 번이나 읽게 된 이유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정말 아. 무. 것. 도 몰랐다는 걸 알았다.


책을 읽다 보니 한 번도 외할머니 집 근처에서 발생한 역사에 대하여 엄마와 이야기한 적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제주도민들이 육지 사람을 이유 없이 배척한다 생각했는데 그 배척에는 어떤 역사적 배경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치적 이념이 무고한 시민을 학살한다’는 끔찍한 문장은 현대사에서 끔찍하게 빈번히 목격되어 어느 순간 큰 의미 없이 다가온다. 그것이 나의 일이 되지 않는 한




<소년이 온다>에서처럼 화자는 ‘죽었는지 살았을지도 ‘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죽어가거나 죽었을지 모르거나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그 불확실한 설정이 만들어내는 신비한 분위기는 주제의 무거움이 줄 수 있는 피로를 잔잔히 덮어버린다.


그런 배경에서 우리는 이유 없이 총살당한 부모, 이유 없이 복역하다 총살당한 것 같은 오빠, 하지만 살았을 수도 있다는 희망에 평생을 오빠를 또는 오빠의 유해를 찾아 나선 그녀의 삶을, 그녀의 딸을 통해 고이 간직한 상자를 하나씩 열어가게 된다.


45년 해방과 50년 6.25 사이의 혼돈과 이념갈등 아래 ‘빨갱이 소탕’의 명분은 언제나 명확했고, 뱃속의 아기도 젖먹이도 빨갱이가 되기엔 충분했다. 무엇보다 영화 <택시운전사> 에서처럼 아무리 꽁꽁 숨겨도 잠입 가능한 육지와 달리 똑 떨어진 섬에서 벌어지는 일은 묻어버리기 쉽다.


그 겨울 삼만 명의 사람들이 이 섬에서 살해되고, 이듬해 여름 육지에서 이십만 명이 살해된 건 우연의 연속이 아니야. 이 섬에 사는 삼십만 명을 다 죽여서라도 공산화를 막으라는 미군정의 명령이 있었고, 그걸 실현할 의지와 원한이 장전된 이북 출신 극우 청년단원들이 이 주간의 훈련을 마친 뒤 경찰복과 군복을 입고 섬으로 들어왔고, 해안이 봉쇄되었고, 언론이 통제되었고, 갓난아기 의 머리에 총을 겨누는 광기가 허락되었고 오히려 포상되었고, 그렇게 죽은 열 살 미만 아이들이 천오백 명이었고, 그 전례에 피가 마르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이 섬에서 했던 그대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서 추려낸 이십만 명이 트럭으로 운반되었고, 수용되고 총살돼 암매장되었고, 누구도 유해를 수습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어.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휴전된 것뿐이었으니까. 휴전선 너머에 여전히 적이 있었으니까




1980년의 5.18 민주화 운동도 여전히 그 의미와 배상에 소음이 많은데 그보다도 30년 전인 1948년에 벌어진 폭력은 잊히기도, 묻히기에도 너무 쉽다.


이념전쟁이 발발하고, 군부가 지속되는 시대에서 ‘사실’은 은폐되어야 하고 죽은 가족을 찾는 것 마저 나의 죽음을 각오해야 하던 시대이니까


책에선 어떤 정치적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단지 끝까지 ‘작별하지 않으려’ 애쓰는 이들의 모습만 그린다.


갑자기 죽어버린 내 가족, 내 사람, 그를 그리려 애쓰던 사람과 제대로 이별하지 못해서, 그렇게 잊을 수는 없어서 산 사람의 생명력을 사자(死者)에게 불어넣듯이 끝까지 작별하지 않으려 한다. 언젠간 그 목소리가 세상에 닿을 듯이


4.3 항쟁 대한 배상은 올해(2022년)가 되어서야 드디어 시작되었다고 한다. 사건이 발생하고도 50년이 더 흐른 2000년에야 4.3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1년 개정안이 통과되어 74년 만에 처음으로 보상금이 지급된 것이다.


드디어 우리는 ‘작별할 수 있게 되었을까?’ 억울한 혼을 달래고 역사 속 비인간성을 반성하고 단죄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책을 세 번이나 읽은 것은 읽다가 힘들어서 중간중간 덮고 며칠을 묵혀두고 다시 책장을 열다 보니 부분, 부분이 명확하지 않아서였다. 내 부채의식을 갚기 위해서 대충 퉁쳐서 읽을 수는 없었으니까


때로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에 지하철에서 훌쩍거린 적도 있다. 이것이 제주의 이야기이고, 엄마의 이야기이고, 내 엄마의 엄마의 이야기임을 깨달은 그 순간에


읽기에도 힘든데 자료를 조사하고 엮어서 이야기로 만들어내야 했던 작가는 침잠하는 자신을 얼마나 끈질기게 붙잡아야 했을까.. 수면으로 끌어올려야 했을까… 신형철 평론가의 말씀이 가늠할 수 없는 무게를 지니는 것은 그 고통의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일 테다.


누구나 노력이라는 것을 하고 작가들도 물론 그렇다. 그러나 한강은 매번 사력을 다하고 있다.
신형철 문학 평론가




주인공에게 악몽인 듯 시작된 수많은 나무의 꿈은, 죽어가는 꿈이 아니라 죽은 영혼들이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꿈이었다.


고통인지 황홀인지 모를 이상한 격정 속에서 그 차가운 바람을, 바람의 몸을 입은 사람들을 가르며 걸었어. 수천 개 투명한 바늘이 온몸에 꽂힌 것처럼, 그걸 타고 수혈처럼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걸 느끼면서


부채의식을 안고 방문한 9월의 제주의 숲에서,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는 이제 내게 단순히 아름다운 자연의 소리가 아니라 외할머니를 비롯한 제주의 영혼들이 나를 따스히 감싸주고 안아주는 소리였다


2022.9월 제주에서



덧) 역사 속 무고한 죽음을 논하던 중, 눈앞에서 어이없고 황망한 죽음을 목격하였다. 전 국민의 가슴에 큰 구멍이 뚫려버린 거대한 슬픔 앞에 조의를 표하며,  더 이상의 무고한 이별이 없도록 1948년의 4월, 2022년의 10월 모두 끝까지 작별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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