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트롯 준결승전을 시청했다. 준결승전임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의 점수 편차가 너무 심해서 저렇게 해도 되나 싶었다. 경연의 초반이나 중반에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쳐도 준결승전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상위 라운드로 올라갈수록 참가자들의 실력차가 그지 않고, 더욱이 준결승전이라면 그 편차가 도드라지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 보편적인 예상이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 간의 편차가 생각 이상으로 크게 나타나는 경우는 판단력과 취향과 사심이 관여했거나 개입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판단력의 경우에는 그 분야의 전문성과 식별력이 떨어져서 그 분야의 본질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취향의 경우에는 심사위원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노래와 무대에는 호감을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비호감을 보이는 것이다. 사심의 경우에는 특정 참가자를 선호하거나 특정 참가자를 선호하지 않거나 하는 것이다.
보이스트롯 심사위원들이 위에서 말한 것들과 관계되어 그렇게 준결승전 심사를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결승전 점수의 편차가 너무 크게 나타나고 말아서, 그 결과만 가지고 볼 때는 다분히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점수의 편차가 크게 되면, 그것도 비율에 의해서 절반과 절반의 호불호에 의한 편차가 아니라 한 개인의 점수로 인해 편차가 크게 나타나면, 그 점수를 받은 참가자는 분명 손해를 입게 된다. 참가자들의 점수차가 크지 않은 경우에는 당락을 결정짓는 중대한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점수의 편차로 인한 불합리를 극복하기 위해, 점수의 편차로 인한 불편한 일들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도입하는 제도가 있다.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한 나머지 점수로만 계산을 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특정 참가자에게 최고점을 준다고 해도 먹히지 않고, 특정 참가자에게 최저점을 준해도 해도 역시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채점 방식은 경연에서 아주 합리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심사위원 수가 많지 않으면서, 또한 이미 진행이 되어 마무리로 가고 있는 프로그램이라면 앞에서 말한 채점 방식을 도입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때는 심사위원 간의 적절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 참가자들의 실력과 그날의 공연에 따라서 심사 점수의 편차가 당연히 있어야 하지만 그 진폭이 과도하게 나타나서는 안된다는 합의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경연의 룰이 담보해야 할 공정성이 확보되는 것이고, 작은 문제라도 발생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최소한 불미스러운 옥에 티를 남기지 않는 것이다.
경연 프로그램의 점수 편차는 청중 평가단에서 나타나는 경우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마추어 청중이고 또 다수여서 한두 사람의 점수 편차로 인해 쏠림 현상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심사위원의 전문적인 평가에서 나오는 비대중적인 판단을 적절하게 보완해주는 장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른바 레전드라고 호명되는 심사위원단에서 점수 편차가 심하게 나타난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고 볼 수밖에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실력을 통해 발휘되는 판단력과, 취향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균형감과, 사심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중심이 어느 하나라도 갖춰지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스트롯은 이제 결승전만 남겨놓고 있다. 결승전이 생방송이 아닐 것이므로 심사의 수준과 형평에 관한 논의는 결승전 심사와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쯤 짚어보고 싶은 문제여서, 준결승전 심사에서 너무 뚜렷하게 나타난 문제여서, 보이스트롯의 노래 감상이 아닌 심사위원들의 점수 편차에 대한 글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