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유독 외롭고, 가장 자신감이 떨어지는 시간대가 아닌가?
나는 새벽에 몇 번이고 잠에서 깨 소녀의 방에 들어가 소녀가 숨을 쉬고 있는지 확인했다. 아침을 맞이한 소녀가 "엄마 굿모닝"이라고 인사해 주면 나의 굿모닝이 시작되었다. 어떤 날은 이유도 없이 입이 댓 발 나와 쌀쌀맞게 굴기도 했는데 일주일 전만 하더라도 버르장머리를 고쳐놔야 한다고 중얼거렸겠지만 주댕이를 내밀고 살아서 걸어 다니는 게, 물도 마시고, 화장실도 가고, 세수도 하고, 머리도 빗는 것이 고마웠다. 책을 붙잡고 소파에 붙박이처럼 앉아있을 땐 너무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책을 읽는 동안엔 적어도 너를 괴롭히는 다른 생각에 빠질 시간이 없겠지.
내가 너를 키워야 살 수 있듯이 너도 살아야 할 이유를 찾길 바랐다. 다시 태어나면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낳을 거야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너를 키워 세상에 멀쩡한 어른을 내놓는 임무를 잘 감당하는 것은 나의 삶의 이유였다. 삶의 이유가 없으면 누구나 삶이 위태로워지지 않은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들 일이었지만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하고 있다. 삶의 이유를 찾는 것은 온전히 자기의 몫이기에 나의 딸, 소녀가 청소년기를 지나며 삶의 이유를 찾는 동안 나는 재밌어서 살게 해 주고, 행복해서 살게 해 주고, 맛있어서 살게 해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노선을 변경하여 다정함으로 무장하기로 했다.
그래 해봐
그래 사봐
먹어도 괜찮아
당연히 되지
어디가 끝인지 모를 세상에서 마음껏 자유를 누리게 한 우리 엄마에게 자란 나는 불안했다. 내가 선택한 것이 맞는 것인가? 이렇게 해도 되는 건가? 잘 안되면 어떻게 할지? 선택을 할 때는 늘 스스로 의심하고 불안했다. 누군가가 잘하고 있다고, 괜찮다고 안심시켜 준다면, 아주 가끔 경계를 벗어났다고 얘기해 준다면 더욱더 편안하게 자유를 만끽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에서 보내는 '엄마는 언제나 내 옆에 있지' 느낄 수 있는 관심과 '내가 어떤 사람이어도 우리 엄마는 내 편이지' 온전한 지지 내가 엄마에게 받고 싶었던 그것을 해보기로 했다. "안돼"가 양육의 핵심인 줄 알았던 나는 정반대의 노선을 선택했다. 난 이것을 '오냐오냐 정책'으로 이름 붙였다.
(휴대기기 사용은 제외다)
소녀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쌌다. 작은 아기였을 때처럼 원초적인 행위로 나에게 칭찬을 받았다. 정수리에선 머리를 감아도 냄새가 났지만 잘 감은 게 맞냐고 묻지 않았고, 소녀가 허락하는 만큼만 쓰다듬어 주었다. 소파 한 귀퉁이에서 햇살을 등에 지고 읽고, 스케치북에 열심히 그리고, 졸기도 한다. 숙제는 다 한 거냐고 묻지 않았다. 나보다 훌쩍 더 큰 딸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보였다. 부모라 해도 모든 순간 자식을 사랑하기는 힘들다. 딸의 유서 덕분에 죽음을 생생하게 상상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딸의 '유서'는 나에게 그렇게 몇 가지 면에서 순기능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