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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여자 Oct 14. 2020

결혼과 이혼 사이에서 D+66

아빠의 기능 보다는 가치

#질투대신 체념

퇴근하는 그의 손에 웬일인지 도시락과 맥주가 없다. 샤워를 하고 말도 없이 나가는 그가 그냥 

낚시하는 동생들과 약속이 있으려니 했다. 참 세상은 좁고 우연은 늘 일어난다. 그것도 두 번이나!! 

인스타 팔로워인 누군가의 사진 한 장에 그의 뒷모습이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의 여자와 같이였다. 이번엔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 마음은 편했겠네.

밥도 사고 술도 샀을 그 상황을 생각하니 갑자기 평화롭던 마음이 파도쳤다. 

'그 언니는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유부녀 유부남끼리 아무리 그저 친구사이라지만 나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밤에 둘이 만나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남편이 알아? 아이들은? 친정엄마한테는 뭐라고 하고 밤에 나

간 거야?'

음악 취향이 맞는 여사친과 신나는 음악을 신청하고, 들으며 다소 무거운 기분이 전환되었을까? 아니면 

약간의 떨림과 설렘? 

아내와 사이가 안 좋은 남자의 외출은 어떤 마음인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나의 마음은 알 수 있었다. 질

투가 아닌 체념. '네가 그렇지.. 약속은 무슨...'




대학 졸업 후 첫 근무지 때의 일이다.

퇴근을 훌쩍 넘긴 시간에 거래사와 얽힌 일을 처리한 후 거래사 팀장님과 저녁 제안에 흔쾌히 나갔다.

베이징 오리와 차를 마시고 헤어졌었는데 나는 그 만남을 엄마에게도 친한 친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날 저녁 손을 잡은 것도, 사랑고백을 한 것도 아니었음에도 그 만남은 계속 '비밀'이었다.

일 년쯤 후 아이가 셋 있는 그 팀장님의 이혼 사유가 바람이 나 집에는 생활비도 주지 않으면서 각종 애

인(?)들과 데이트를 즐긴 것임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10만 원어치의 베이징 덕과 후식이 그 아

이들의 학원비 또는, 옷값, 식비였을 거라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어" 그들이 흔히 하는 말은 이렇다.

하지만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부정행위인지 아닌지 정의를 내릴 수 있는 기준 중 하나는 '비밀'인지 

아닌지 라는 것을. 내 생각은 그렇다 부끄러운 짓은 행위가 아니라 마음으로 시작된다.


#아빠의 기능보다는 아빠의 가치


"양육비는 이혼 서류 정리하면 줄게. 그때까지는 집 대출금도, 관리비도 다 반반이야."


그는 66일전 내가 양육비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선언했다. 


큰아이는 TV를 보며 자주 말한다. "나도 우리 아빠가 연우네 아빠 같았으면 좋겠어"

그에게 남편으로서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고, 화가 나고, 불평이 나올 때마다 내가 나의 마음을 다독였던 생각은 단 한 가지였다.

"존재로서의 가치"

저녁이 되면 집에 와 자기 방에만 있을지언정 같은 집 안에 있고, 밤이 되면 그 자리에서 든든한 뒷모습을

로 잠을 자고, 게다가 생활비도 주는 아빠로서의 가치는 소중하고 귀하다고 마음을 다독였다. 

아이들에게는 아빠의 존재 자체로 가치가 있지만 나에게 그의 '존재 가치'(남편으로서 가장으로서)가 있

다고 느껴지지 않을 때 보통은 이혼을 하게 되는 게 아닌가? 

그의 선포대로라면 나는 이혼을 해야 양육비를 받을 수 있고, 재산분할을 하면 차도 내가 사용할 수 있

게된다.(그의 바이크와, 차도 재산분할 대상이 되는데 바이크 시세가 더 비싸니 남편에게 선심 쓰고 차는 

내가 쓰면 되겠지) 계산상으로는 지금 상태보다는 도장을 찍고 남남이 되면 내가 이익(?)이 되는 셈이다.



"난 꼭 아빠옆에 자고 싶어"

나와 남편의 사이에 누운 아이는 나의 손을 먼저 잡고, 반대편 손으론 남편의 손을 잡았다. 평소처럼 아이의 손을 잡았는데 아이의 손을 잡은 손은 그의 손을 잡은 것처럼 어색하고, 경직되어 있었다. 그것을 눈치챘는지 아이는 내 손을 조물조물해주고, 손등을 톡톡 쳐주며, 다시 깍지를 낀다. 어둠속에서 한참을 뒤척이지 않고 눈을 말똥거리고 있으니 곧 아이의 새근새근 잠이든 숨소리가 들린다. 잠든 아이를 이리저리 만져, 머리를 쓸어 넘겨준 후 베개에 머리를 붙인 그의 숨소리도 들린다. 아직 잠이 들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잠이든 아이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깨어있었다. 우리(?)는 깨어있을 땐 말한마디 섞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한 방에 누워 그와 나의 들 숨과 날 숨이 서로 대화를 하듯 오고갔다.  아이는 뒤척이다 남편을 꼭 끌어안았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아빠에게 안겨있는 아이의 뒷모습을 본다. 그가 미워 아이를 품에 안을 때 그 행복한 느낌을 절대로! 그와 나눠갖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하고 싶다는 생각이 지금 내 맘에 이율배반이다.

'추울 때, 무서울 때 언제든 안길 수 있는 아빠가 있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어휴!' 나도 모르게 내 입술에서 작은 탄식이 흘러나온다. 등을 돌리고 돌아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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