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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 Jul 29. 2021

위태로워도 결국엔, 우리, 둘

서로에게 서로가 전부인,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나는 종종 이상을 꿈꾼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층에 살면서 함께 식사를 하고 같은 침대에서 눈을 뜨지만 내 독립적인 공간을 가질 수 있는 삶.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이다. 필리포 메네게티의 [우리, 둘] 속의 니나와 마도가 그런 사랑을 하고 있다. 니나와 마도는 서로의 삶 속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만 그와 동시에 독립적인 존재이며, 함께 존재하는 미래를 그려간다. 행복하고, 사랑이 충만한 그런 관계가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니나와 마도의 관계는 파고들어보면 그렇게 이상적이지 못하다. 두 사람은 살고 있는 집을 중개인에게 팔고, 처음 만났던 로마에서 노후를 함께 보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마도에게는 자녀가 둘이나 있고, 손자도 있다. 니나와의 미래를 위해서 마도가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자식들에게 니나와의 관계를 솔직하게 털어놓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마도의 아들 프레드릭은 그간 마도를 질책하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건 마도에게 상당한 상처와 부담감을 남겼을 것이 분명하다. 니나는 그저 마도가 용기내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장장 20년을.


마도는 결국 자식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니나는 오랜 기다림의 끝에 결국 지쳐버렸고, 완벽한 것만 같던 두 사람의 사이에는 균열이 생겼다. 마도는 쓰러졌고, 니나는 방황했으며, 진실은 모두를 아프게 했다.


그 잔혹한 상황 속에서 견고한 건 오로지 니나와 마도, 두 사람밖에 없었다.  



사랑은 현실이다 


나는 종종 이상을 꿈꾸는 동시에 지독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동안 니나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니나는 불꽃같은 사랑을 했다. 잠시라도 마도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했고, 정말 마도의 곁을 쉼 없이 지켰다. 쓰러진 마도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긴 것도 마도의 집을 찾아온 니나였으니까.


문제는 그 사랑이 자꾸만 어긋난 방향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니나는 경주마처럼 마도만 보고 달렸다. 마도가 걱정돼서 간병인이 함께 자고 있는 마도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간병인을 쫓아내기 위해 차를 파손시키는 것도 서슴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마도의 딸이 함께 있는 마도의 집에 몰래 들어가 결국엔 들키기까지 했다.


나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도와의 관계를 지키고 싶으면 니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됐다. 니나가 그럴수록 마도는 계속해서 니나에게서 멀어져갔다. 그럼에도 마도는 여전히 니나를 사랑했으니 결국엔 니나가 성공한 것일지 몰라도, 내 관점에서 니나는 그렇게 하면 안 됐다.


니나의 행동은 영화를 보는 내내,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후에도 계속 나에게 의문점을 남겼다. 아무리 사랑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사랑을 시작한지 3개월째인 것도 아닌 20년이 지난 지금 니나가 그렇게 앞뒤 재지 않고 사랑에 뛰어드는 것이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었다. 내가 마도였다면 그런 니나가 힘들었을텐데 도대체 마도는 어떻게 끝까지 니나를 사랑할 수 있는 거지? 마도의 행동도 의문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영화의 말미에서 니나의 품에 안긴 마도는 영화에서 본 것 중 가장 행복하고 편안한 표정이었으니까.  

 

오랜 생각의 끝은 20년이라는 시간에 닿고 나서야 해답을 찾아냈다. 니나는 20년 동안 마도의 곁에서 자리를 지켰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온 힘을 다해 사랑으로 자식들을 키워내는 걸 20년 동안 지켜보기만 했다. 그 동안 니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마도의 연인으로 소개할 수 없었다. 마도가 쓰러져 중환자실에 있어도 니나는 그저 이웃 사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밤새 병실에 있어줄 수도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니나는 마도를 위해 가이드로 살아온 인생을 포기하고 프랑스에 정착했다. 니나에겐 마도가 자식들에게 모든 걸 밝히고, 함께 행복한 노후를 보내는 게 무엇보다도 큰 목표였을 것이다. 그걸 위해 니나는 열심히 돈을 모았고, 마도를 기다려줬다. 그건 다 니나의 사랑이 불꽃같아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현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실에 가까운 게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니나에겐 아니었다. 현실은 니나에게 가혹했지만 마도의 사랑은 그 현실을 버티게 해줬다. 그랬던 마도가 무너지고 나서 니나의 현실도 무너지기 시작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니나의 행동들은 어쩌면 그 동안 니나가 견뎌야 했던 현실에 대한 울분이 터져 나온 걸지도 모른다. 나였다면 이미 그 현실에 잠식당해 사랑을 포기했을 게 분명한데, 니나는 그러지 않았다. 나름대로 상황을 타개하고 마도와 함께할 수 있는 방안을 끊임없이 강구했다. 그 과정이 다소 과격하여 극의 긴장감을 극대화시켰지만, 그게 니나의 사랑이고 현실이었다.   



호수 속 소녀는 니나였을까, 마도였을까.



영화의 장르에는 로맨스가 명시되어 있지만 장르가 서스펜스인 건 아닐까 의심하게 하는 장치를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영화 초반부터 등장하는 까마귀 울음소리나 니나가 현관 외시경으로 복도의 상황을 살피는 장면 같은 것이 그렇다. 그중 하나가 호수 속 가라앉은 소녀의 시체다. 니나는 꿈 속에서, 마도는 호수에 빠진 손자의 공을 꺼내주다가 호수 속 소녀를 보게 된다. 이 소녀의 의미가 무엇일지는 전적으로 관객의 해석에 달려 있다.


나는 이 소녀를 두 사람의 불안감으로 해석했다. 마도가 호수 속에서 넘실대는 소녀의 옷자락을 봤을 때는 가족들에게 니나와의 미래 계획을 고백하려고 하던 때이다. 그 당시 마도는 중압감에 갇혀 있었다. 가족들을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 그럴 수 없다면 니나에겐 어떻게 말해야 할지에 대한 불안감이 마도의 안에서 커지고 있었다.


니나가 꿈 속에서 그 소녀를 마주한 건 마도를 잃었을 때이다. 마도가 쓰러진 후, 예전처럼 자유롭게 마도를 만나지 못하게 된 니나는 상당한 불안 증세를 보인다. 그 불안감이 꿈 속에서 형상화된 것이 그 소녀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의미가 뭐가 됐든, 두 사람이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둘 



영화를 보는 내내 미간은 좁혀져 있었고, 상영이 끝난 후에도 영화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95분이라는 러닝타임 내내 두 사람의 사랑에 공감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마도의 상황에 이입하기도 했다가 니나의 상황을 이해하기도 하면서 이 사랑이 보기보다 순탄치 않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도의 딸인 앤의 혼란스러운 감정 역시 또렷하게 드러나 보는 이들의 마음을 한껏 무겁게 한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둘]을 당신에게 추천한다. 이 영화는 여타의 퀴어 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을 주었다. 나는 퀴어 장르의 영화를 몇 편 본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내가 느낀 건 ‘예쁜 영화’라는 점이었다.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셀린 시아마 감독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등의 퀴어 영화는 스토리나 연기 측면에서도 극찬을 받았지만, 그것보다도 대중들에게 이 영화들을 각인시킨 것은 심미적 요소이다. 색감이나 화면 연출, 미쟝센 등 아름다운 영상적 요소는 보는 이들의 뇌리에 이 영화들을 깊게 박아 넣었다. 퀴어 영화의 영상미는 영화를 기대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나에겐 이런 영상미가 가미되지 않으면 퀴어 영화가 셀링 포인트가 완성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일종의 의문이었다.


그런데 [우리, 둘]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사는 곳은 평범한 파리의 아파트이고, 영화의 색감이 도드라지게 인상 깊은 것도 아니다. 특별히 눈에 띄는 미쟝센도 없다. 그저 니나와 마도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 점이 오히려 내게는 특별하게 다가왔다. 오롯이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전하고자 한 것이 몰입감을 선사했다. 중년의 사랑이라는 점도 영화의 매력을 한껏 끌어올린다.


니나와 마도는 결국 서로에게 다시 돌아갔다. 마도는 쓰러졌고, 니나는 눈물 흘렸지만 결국 그들에게 남은 건 서로였다. 영화의 말미에서 연출되는 니나와 마도의 평화로운 모습은 사랑만으로는 그들의 현실을 극복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 편협한 사고가 깨뜨렸다. 결국 그들을 웃게 하는 건 서로의 사랑이었다.


이번 여름, 소중한 사람과 함께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어떨까.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5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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