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어딘가로 도망쳐버리고 싶은 당신에게
요즘 생긴 신조어 중, 최근에야 그 뜻을 알게 된 단어가 있다. 바로 ‘스불재’이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을 줄인 단어라는데, 내 인생을 그 세 글자로 함축시킬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내 인생은 대개 내가 초래한 재앙으로 뒤덮여 있기에 이 단어가 정말 와 닿았다. 그렇지만 스스로 불러왔든, 외부 요인으로 발생했든, 자연적으로 일어났든 재앙은 재앙이다. 재앙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을 것이고, 나 역시 벗어나고 싶은 순간은 항시 존재한다. 지금 내가 처한 게 곤경이 아니더라도 일단 도망치고 보자, 싶은 순간들이 있다.
도망치고 싶은 욕구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주로 학기의 중간 정도나 방학의 입구에서 마주친다. 급격한 불안감과 초조함, 마주한 나의 무력감과 그로 인한 탈력감은 날이 가면 갈수록 그 몸집을 불려가고, 그것과 부딪혀 이길 자신이 없을 땐 그저 도망치고만 싶다. 가고 싶은 곳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니면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리고 싶은 날들, 그럴 땐 도망도 칠 수 없는 내가 싫어지기도 한다.
막막한 마음에 한없이 도망가고만 싶은 사람들을 위로해주는 노래가 하나 있다. 바로 선우정아의 <도망가자> 이다. 원곡이 아닌 커버 곡으로 먼저 접했던 노래였는데, 가사가 먹먹하게 다가와 바로 원곡을 찾아 들었다. <도망가자>는 뭘 찾기 위해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내고 있는지도 모르던 내게 위로의 손을 건넨 따뜻한 노래였다.
싱어송라이터 선우정아가 따뜻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도망가자> 노래가 이탈리아 볼로냐 사일런트 북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곽수진 작가의 그림과 만나 한층 더 따뜻해진 이야기가 되었다. 소박하지만 아늑한 그림이 품고 있는 사랑이 담긴 노랫말을 만나보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fNrhdZwhj-c&t=15s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무작정 회피하고 보는 성격은 아니지만, 조금 지쳤을 때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하는 편이다. 주로 상상에서 그치긴 하지만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내 상상 속에서 나는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훌쩍 떠나곤 했다. 이를테면 뜻을 알 수 없는 외국어가 들리던 낯선 외국의 거리, 사람 없는 바닷가, 자전거를 타고 달렸던 작은 길 같은.
그 상상 속에서 나는 항상 혼자였다. 그냥, 그게 좋았다. 도망이라는 행동에 동행자를 두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다 두고 도망치는 거라면 혼자 떠나는 편이 더 후련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그런 나에게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는 색다른 시야를 틔워주었다.
함께. 이 두 글자가 지니는 힘은 크지만 그건 긍정적인 상황에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지 힘든 상황에서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다. 함께라는 것이 마음의 위로는 될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힘들 때마다 함께이고 싶어 했으나 그것이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부딪힐 때마다 슬퍼했던 것 같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말뿐인 위로를 건네는 게 다였으니까. 그래서 나도 부러 누군가에게 나의 고충을 깊게 꺼내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위로는 그렇게 깊은 어둠을 보이지 않아도 충분하였다.
그래서 언젠가 이 모든 걸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왔을 때, 도망치지 않고는 터져버릴 것 같은 심장을 잠재울 수 없을 것 같을 때, 그 상황을 책임져야 하는 건 오롯이 나라고 생각했다. 어찌 됐든 그렇게 된다면 난 상황을 타개할 능력도 의지도 없이 도망쳐버리는 거니까 그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에게 전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너랑 있을게. 그런데 선우정아는 그렇게 말한다. 먼저 도망쳐버리자고 손을 내밀고는 거기가 어디든 나는 너와 당연히 함께할 것이라고. 내가 감당하고 있는 마음의 무게를 기꺼이 나누겠다고 말한다. 나를 갑갑하게 내리누르는 현실에서 도망치는 상황에 누군가가 옆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선우정아는 조곤조곤 ‘함께’ 할 것을 말한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줄곧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건네고 싶었나 보다. 그가 가진 부담을 함께해주고 싶었다.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주고, 너만큼은 아니어도 나 역시 온 마음 다해 너에게 공감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은 위로받곤 하니까, 그 위로를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게 한낱 알량한 오지랖으로 치부되는 것이 무서워서 그러지 못했다. 주제넘은 기만으로 받아들여지는 게 싫었던 것 같기도 하다.
선우정아의 노래는 내 그런 생각이 쓸데없는 생각이었다는 걸 일러주는 것 같았다. 뭐가 됐든 함께라는 건 언제나 힘이 되는 말이고, 그게 힘든 상황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순간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도망가자>는 그 무엇도 아닌, 함께하겠다는 가사의 의미가 건네는 위로가 큰 곡이었다. 내가 그의 노래에서 받은 위로는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꼭 잡아 오는 손의 온기. 딱 그 정도였다.
그러니까, 따뜻했다는 말이다.
노래 <도망가자>가 내게 함께의 의미를 알려줬다면, 그림책 [도망가자]는 그 함께의 의미에 따뜻함을 한껏 더해주었다. 곽수진 작가는 따뜻한 색감의 그림으로 위로의 말을 담은 가사를 표현했다.
시대의 전유물이라는 게 있다. 내게 그림책은 그중 하나였다. 어린 시절만이 가질 수 있는 것, 그림책. 그도 그럴 것이 어른이 되고 나서는, 아니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그림책을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삽화가 거의 없는 책이나 만화책만 읽었지 그림책을 읽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림책은,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그 얇은 책은 아이들만이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있었다. 다시 읽게 된다면 잃어버린 동심이 돌아오나? 하는 생각도 했다.
오랜만에 펼친 그림책은 그런 생각을 산산이 조각냈다. 그림책은 그냥 그림책이다. 어린아이만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른 안의 동심을 끄집어내는 존재도 아니었다. 그림으로 내용을 전하는 책. 그 명백하고도 간단한 사실을 나는 오랜 시간 외면해 온 셈이었다.
책 속 주인공은 하얀 개와 함께 이곳저곳을 다닌다. 현실을 뜻하는 집을 벗어나 산으로, 바다로 다니는 동안 둘은 줄곧 함께한다. 먼저 떠나자 말해주는 이가 주인공인지, 강아지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편이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일 테니 말이다.
곽수진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이 하얀 개가 작가와 함께 했던 노견임을 밝혔다. 이 그림책의 이야기가 함께 가는 동반자에 초점을 맞춘 이야기라는 것도. 오랜 시간 내 곁을 지켜준 노견과 함께하는 마지막 여행. 작가는 그 여행을 그림으로 풀어내며 노랫말을 입혔다.
그림을 보면서 나의 강아지가 생각이 났다. 난 힘에 부치는 순간이 오면 내 강아지를 꼭 안는다. 평소에는 꼭 끌어안는 걸 답답해하는 그 애는, 그럴 때면 내가 힘들다는 걸 눈치라도 챈 것처럼 가만히 안겨준다. 가만히 안겨서 내 코를 핥아주는 그 따뜻한 온기는 내 마음을 토닥여준다. 그 따뜻함이 그림에서도 전해졌다. 그림 속 주인공과 강아지가 서로 그런 온기를 주고받는 것 같았다. 내가 우리 강아지에게서 받는 만큼 그 애에게도 내가 힘이 됐으면 좋겠는데,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애를 토닥여주는 것밖에 없다. 그저 내 강아지가 살아내고 있을 그 아름다운 삶에 내가 조금이라도 행복한 기억이 되길 바랄 뿐이다.
나는 미술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곽수진 작가의 그림을 미학적으로 논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곽수진 작가의 그림은 조화롭다는 것이다. 때로는 알록달록하고 때로는 차분한 색감과 여기저기로 불규칙한 붓 자국 혹은 색연필 자국의 조화가 좋았다. 거기에 더해진 손글씨는 가사를 몽글몽글하게 전달해준다.
원곡의 뮤직비디오는 굉장히 차분하고 어두운 분위기이다. 그 영향 때문인지 나는 원곡을 들을 때마다 한껏 차분해져서는 조곤조곤한 그 말들을 들었다. 그런데 그림책 [도망가자]는 발랄하면서 따뜻한 이미지를 살려 노래의 느낌을 확 다르게 바꿔 버렸다. 시각적인 이미지가 주는 영향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차분함 속에서 내 생각을 정리하고 싶을 때는 노래 <도망가자>를, 우울해진 기분을 산뜻하게 바꿔줄 수 있는 위로가 필요할 때는 그림책 [도망가자]를 찾게 될 것 같다.
이 순간에도 도망을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 눈을 뜨면 기다리고 있을 감당해내야 하는 모든 것들이 아득한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그들에게 선우정아의 <도망가자>와 곽수진 작가의 [도망가자]를 전하고 싶다.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을 벗어나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도망치는 데도 큰 용기가 필요하지만, 다시 현실로 돌아오는 것도 그 못지않게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도망가자’는 어디든 가야 할 것 같다며 함께 떠나자고 말하지만, 다시 돌아올 것을 분명히 얘기한다. 멀지 않은 곳이라도, 짐이 많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어디로든 떠난 다음, 실컷 웃고 나서 다시 돌아오자고 말한다. 좀 느려도, 천천히 걸어도 괜찮으니 씩씩하게 돌아오자고 말이다.
다시 돌아오자는 그 말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다시 돌아온다면, 그때는 날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고충을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다시 돌아온 후에도 내 자리가 온전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다 내려놓고 도망쳤다가 돌아올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내가 진 짐이 무거워서 잠시 내려놓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짊어지느라 고생한 어깨와 다리를 풀어주고, 한 바퀴 산책한 후 언제든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그래도 괜찮다. 어디를 간다 해도 우린 서로를 꼭 붙잡고 있으니.
각박한 현실에 답답한 마음을 홀로 끌어안고 있을 당신에게 이 노래와 그림책을 내밀어주고 싶다. 지금, 도망가자고. 그리고 다시 돌아오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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