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사장, 소마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나의 삶은 나와 공존한다. 내가 살아가기에 삶이 있고, 내가 가는 곳에 삶도 함께 한다. 그렇다면 삶은,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내 삶에는 무엇이 남는가.
이 철학적인 질문은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한 번은 날 찾아온다. 이 질문은 소마에게도 찾아왔다. 채사장 작가는 소마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이 질문을 전달하고 있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소마]는 한 소년의 일생을 담아낸 소설이다. 총 6부로 이루어진 그의 삶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처럼 쉽지 않다. 유소년기에 가족을 잃고 낯선 곳에서 자라게 된 그는 양아버지의 홀대와 양어머니의 사랑을 동시에 받고 자랐다. 거기에 동생의 시샘이 더해져 그는 어디에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사람 많은 저택에서 자랐지만 외로이 자란 소마는 유색인종이며 이교도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세상의 적대와 싸워왔다.
소마는 이름을 잃었다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친구를 얻었다가 친구를 잃었다. 커다란 권력을 쥐었지만 끝내 그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마지막은 공허했고, 공허했기에 충만했다. 그런 그의 삶을 따라가는 내내 울었다던 채사장 작가의 말처럼 나 역시 그렇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을 가지고 싶어했던 상처 많은 소년이 결국 세상을 가졌을 땐 환희했고, 피의 복수에 성공했을 땐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그리고 그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땐 절규했다. 이 모든 감정들이 마치 내 것인양 생생했다.
채사장 작가는 그것이 소마가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마의 아버지는 아들을 잘 다듬어진 화살이라고 말한다. 잘 다듬어진 화살이 궤적 위에서 방향을 틀지 않듯이, 올곧은 여행자도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소마 역시 그럴 것이라고 말한다. 삶의 여정 속에서 길을 잃는 순간이 와도 분명히 소마는 원래의 궤적을 찾아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소마의 아버지가 옳았다. 소마는 올곧은 여행자였다. 그가 가는 삶의 여정 속에서 소마는 몇 번이나 경로를 이탈했지만, 끝내 그의 화살촉은 궤적의 끝에 도달했다. 소마는 흔들릴 지언정 부러지지 않는 화살이었던 것이다. 소마는 어린 날에 그랬듯이 내면의 소리를 들으며 인생을 마무리한다. 거기에 다다를 때까지 수많은 고통이 그와 함께했지만, 결국 남은 건 온전한 소마였다. 그것은 소마가 잘 다듬어진 화살이었기 때문이다.
잘 다듬어진 화살. 그건 내가 되고 싶은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빠른 화살이 되고 싶었다. 빠른 화살이라면 적의 심장에, 눈으로 쫓기 힘든 상공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바람을 가르는 화살처럼 순식간에 내 앞에 놓인 과업들을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빠른 화살이 되기는 글렀으니, 이젠 내가 잘 다듬어진 화살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다. 소마가 내면의 소리를 따라, 스스로의 의지를 따라 본인의 궤적을 완성했듯이 나 역시 나의 궤적 안에서 올곧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다.
채사장 작가의 이야기는 날카롭다. 딱히 날이 서 있는 것도 아닌데도 날카로워 가슴이 아린다. 오히려 건조한 문체가 버석버석하게 심장에 불을 붙인다. 이름을 잃은 소마가 웅크린 채 아데사에 저택에서 살다가 진실을 알게 된 후 각성하는 모습은 묘사 그 자체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들었다. 그의 분노가 가감 없이 느껴졌고, 후에 아틸라의 환생으로 묘사되는 그의 영웅기는 경이롭기까지 했다. 다소 잔인하다고 느껴질 수 있는 그의 복수조차 그의 삶의 울분에 대한 정당한 응징으로까지 느껴지게 한다.
그러나 채사장 작가의 말대로 영웅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어야 했다.
이교도들을 배척하고 본인들의 실리만 취하려고 했던 악독한 종교인들을 응징하고, 가족의 복수를 한 무시무시한 아틸라의 환생. 크레도니아의 왕이 되어 질서를 정립하고 국가를 부유하게 한 국민의 영웅. 불길에 부모를 잃고 시샘과 미움 속에서 자라나 죽음을 이겨낸 후 결국 세상을 손아귀에 넣은 소년. 소마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소마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는 오래 지속된 전쟁으로 인해 공허해진 마음을 채울 수 없었다. 전우들은 모두 곁을 떠나갔고, 남은 가족도 없었던 소마는 결국 타락하고 만다. 권력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는 영웅이라고 칭송받던 시절이 아득할만큼 볼품 없고 비참하게 삶의 마지막 장을 열게 된다. 그 과정이 독자로서는 비통하고 안쓰러워 한 장 한 장 넘기기가 점점 고통스러워졌다. 어쩌면 소마만큼이나 소마의 성공을 바랐던 나였다. 이렇게 스러질 사람이 아니다, 라며 소마가 죽음을 이겨낼 때마다 소리 없는 박수를 치던 나였다. 그렇기에 소마의 이야기는 거기서 멈췄어야 했다.
그건 전부 소마가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마는 영웅이 아니다. 소마는 소마다. 그는 그저 한 명의 인간이었을 뿐이며, 매 순간 스스로 자문했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았던 것이다. 결여된 사랑을 세상에서 얻을 수 있을 거라 답했기에 세상을 가지고 싶어했고, 그것이 오답이었으니 타인에게서 사랑을 찾고자 하여 이오페에게서 사랑을 찾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된 상황에서 자아를 찾은 것도 소마가 자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소마가 찾은 자아는 ‘소마’였다. 이 세상을 겪어낸 본인 자체가 소마의 자아라는 걸 꺠달았다. 결국 소마의 성공도, 몰락도, 영원한 안식도. 결국 소마가 소마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마가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마다 그는 내면의 목소리를 만났다. 가장 처음 그 목소리를 만난 건 화살을 찾으러 마을을 떠났을 때다. 그때는 그 목소리가 신이라고 생각했다. 혹은 악마일 것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복종이니, 제물이니 하는 것들을 논할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헤보니 그 목소리는 소마의 자아 목소리였던 것 같다. 그래서 소마가 스스로를 잃어버렸던 시점을 계기로 더 이상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소마의 자아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것이다. 이 시련을 이겨내겠느냐고, 아니면 도망치겠느냐고.
생각해보면 소마의 목소리는 매번 대안을 제시했던 것 같다. 제물을 바치면 화살을 찾는 시험을 끝내주겠다고도 했고, 소마가 사경을 헤맬 때 죽음을 선택할 수도 있게 했다. 그때마다 고난을 마주하는 것을 선택한 건 소마였다. 모든 건 소마가 직접 선택했다. 그리고 소마는 그에 대한 책임을 졌다. 이제는 늙어버린 바가렐라를 마주하고 하루 아침에 늙어버린 것도, 간신히 목숨만 붙어 있던 헤렌의 가슴에 칼을 박아넣은 것도 전부 소마의 선택이자 그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 되었다.
채사장 작가는 이렇게 다양한 인물의 대립을 그려내면서 독자가 스스로 자아를 찾도록 유도한다. 종교적, 역사적 대립을 배경으로 등장인물들은 끝없이 대립한다. 한때는 같은 편이라 여겼던 이들마저 크고 작은 대립을 통해 스스로의 선택을 한다. 소마 뿐이 아니다. 한나도, 바가렐라도, 우만도 스스로 선택을 내린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건 그들 자체의 선택이고 그들이 그릴 궤적이 된다.
이제 나는 내 목소리를 찾고 싶다. 어린 소마처럼, 내게도 나만의 목소리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잃어버린 나의 목소리를, 나의 자아를 다시 되찾고 싶다. 그 목소리가 내게 돌아와 내가 궤적에서 벗어났음을 일러주고, 경로를 다시 탐색하는 것을 마주할 것인지, 아니면 그저 포기할 것인지 물어주었으면 좋겠다.
그 끝에 올곧은 궤적을 따라 달려온 내가 있든, 내가 바라지 않던 이의 얼굴을 한 내가 있든 결국 나는 내 안의 자아를 만나게 될 것이다. 늑대는 다시 돌아올 것이고, 봄은 다시 찾아올 것이며, 대지가 푸르러지며 이 삶도 되돌아 올 테니까.
이건 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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