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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 in Apr 11. 2021

미국에서 중국어가 늘었다

내가 외국어 공부하는 법

  영어 수업을 듣기 위하여 처음으로 Metro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갔다. 버스 안이 텅텅 비어 있을 줄 알았는데 직장인들과 학생들로 버스는 만원이었다.  버스 안에는 특히 한중일 3국의 동양인이 많이 있었다. 그곳에서 중국어가 들려왔다.


 영어를 배우러 학교에 가면 영어가 늘어야 하는데 중국어가 일취월장했다. 반에는 11명의 학생들 중 대만인 5명, 나를 포함 중국어가 가능한 한국인 2명 총 7명이 중국어가 가능했다. 적극적인 대만 친구들은 중국어가 가능한 나를 환영했으며 모두 미국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방인으로서 자신이 알고 있는 사소한 정보도 나와 아낌없이 공유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나는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는 외톨이였다. 같은 반에 한국 여학생이 없기도 했지만 두 명의 한국 남학생들은 결혼한 유부녀에게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거리를 두었다. 결혼 전과 다르게 인간관계가 좁아지는 것처럼 느껴져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한인 타인의 한국 미용실을 갔다. 남편의 머리가 단발머리가 될 정도로 많이 자랐다. 한국인 사장님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자 사장님은 남편과 내가 어느 교회를 다니는지 물어보았다. 교회를 안 다닌다고 했더니 사장님은 바쁘게 움직이던 가위질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교회가 얼마나 좋은데 왜 안 다녀요? “

“어디든 꼭 교회를 다녀야 해요”

사장님은 머리를 다 손질하고도 가위를 손에 내려놓지 못하고 안타까운 듯 한참을 전도를 했다. 하지만 일요일 아침을 느슨하게 보내고 싶었던 나와 남편은 이후로도 한인교회에 가지 않았다.


 미국에서 한인교회나 한인 성당을 다니지 않는 한국인은 없을까? 내가 만났던 한국 사람들 중 교회나 성당을 다니지 않는 사람은 우리 부부뿐인 것 같았다. 직장을 다니는 남편은 일을 통해 만난 한국 동료들과 소속감이라도 느꼈겠지만 한인교회나 성당을 향하지 않았던 나는 어디에도 속해 지지 않는 한국 커뮤니티 속의 이방인으로 느껴졌다. 결혼 전이었던 중국에서는 학교 내에 한국 학생이 워낙 많았고 한국인 친구 사귀기가 숨 쉬는 것만큼 쉬웠지만 결혼 후 미국에 오니 상황은 달라졌다. 남편의 뒤에서 어디에도 교집합이 없던 나는 같은 나라 사람인 한국 친구를 사귀는 것이 외국인 친구를 사귀는 것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 단지 안에 피트니스센터가 있었다. 매일 오후에 운동을 했고 그날도 빠른 걸음으로 걷다가 속력을 내어 뛰기 시작했다. 30분을 달린  사이클 위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발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커다란 목소리로 내 이름을 중국어로 불렀다. 대관절 미국 피트니스센터에서  한국 이름도, 영어 이름도 아닌 나의 중국 애칭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일까?


 설마 내가 헛것을 들었나??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불렀던 사람은 북경에서 친하게 지냈던 W 집에서 만났던 그녀의 대학 후배였다. 우리는 너무나 놀라 비명을 질렀다. 어째서 여기 있는 것이냐며 둘 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우리 사이의 연결고리인 친구를 떠올렸다.


 몹시도 추웠던 겨울, 미국에서 북경을 방문했던 Y, 내 친구 W 그리고 나. 우리 셋은 모전욕 만리장성(慕田峪长城: 무티엔위 창청)에 갔었다. 정상에 도착하여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와 식당에 들어가 몸을 녹이며 맛있는 음식을 먹었던 춥고도 포근했던 그 날을 떠올렸다. 인연에 대하여 생각하니 새삼 신기하고, 미국에서 Y와의 새로운 만남에 설레었다.


 여름휴가에 맞춰 W는 그녀의 아이들을 만나러 미국에 왔다. 북경에서 헤어진 후 5년 만이었다. 어제 만난 것처럼 덤덤하게 서로의 안부를 나누었다. 미국이 아니 이 세상이 정말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Y의 가족들을 만났고, W의 소개로 미국에 사는 그녀의 중국 친구들을 알게 되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간 학교에서도 대만 친구들과 어울리고 예상치 못하게 미국에서 중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많았다. 미국에서 영어를 배우며 운 좋게도 중국어를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언어 환경이 주어졌다.


  14억 인구의 중국 그리고 대만, 홍콩, 마카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중국어권 국가들. 나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닌 여행을 가든, 살러 가든 해외에서 어딜 가나 중국인은 많았다.  정치적인 견해의 차이로 중국 친구와 때론 서로 오묘하게 신경전이 오고 가기도 하지만, 미국에서는 같은 아시안이라는 동질감으로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미국에서 중국어가 쑥쑥 늘 만큼 중국어권 친구들과의 인연을 만들어갔지만 좁디좁은 한인사회에서 나는 아웃사이더 같았다. 중국어와는 별개로 나에게는 든든한 남편이 있었고 한인 교회나 성당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을 사귀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소심하게 나를 위로를 해본다.


 우리의 인생 여정에서 같은 나라 사람이든 외국인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서로를 웃게 하고, 함께 일 때 햇살처럼 따스함을 느끼는 친구를 만난다면 행운을 발견한 것이다. 서툰 외국어로 전했던 나의 진심을 알아주었던 이방인 친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그들과의 여행은 끝났지만 몽글몽글한 추억은 내 안에 계속 살아있다.



  

 마지막으로 짧은 이방인의 생활 동안 알차게 배웠던 나의 외국어 공부법을 돌아보았다.  


 사랑과 우정. 외국어 실력을 늘리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다. 아쉽지만 로맨스는 없었다. 그러나 원어민 친구를 많이 만나고 그들과의 우정을 쌓는데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외국어 실력은 늘었다.  막상 원어민 친구를 사귀려니 막막해서 직접 원어민이 많이 있는 곳을 찾아갔다. 학교 동호회나 자원봉사 활동 등을 통하여 여러 만남의 기회가 생겼다. 덕분에 소극적인 내 성격이 적극적인 성격으로 변신했다.


 들이대기. 나는 수업이 끝나면 그 날 배웠던 인상 깊은 문장을 반드시 현지인에게 사용하려고 했다. 수시로 원어민 친구들과 밥도 먹으러 가고 쇼핑도 하러 갔다. 쇼핑을 하면서도 달라는 대로 덥석 물건을 사지 않고 반드시 실랑이를 통해서 물건 값을 깎아도 보고 여러 가지 상황을 만들었다. 내가 경험한 만큼 , 내가 쓰는 돈에 비례해서 외국어 실력은 올라갔다. 상점 주인의 욕하는 소리가 들리고, 옆집에서 하는 말소리가 들리고, 외국어로 꿈을 꾸는 날이 왔을 때는 내가 배우고 있는 언어가 쑥쑥 늘고 있다는 신호였고 박차를 가해서 현지인의 생활 속으로 들어갔다.


 유지하기. 짧은 이방인의 생활을 마치고 온 이후의 3년이 가장 중요했다. 한국에 돌아와 최소 3년의 시간 동안 꾸준히 원어민 친구들과 채팅이나 보이스톡을 통해서 말하고 듣고 쓰는 연습을 하며 현지에서 구사했던 외국어 감각을 유지하거나 끌어올릴 수 있었다. 왕도는 없다. 무조건 많이 듣고 많이 말을 했다.


친구는 외국어를 배우는데 커다란 동력이 되었다. 나의 이방인 친구들과 마음을 나누기 위하여 앞으로도 외국어 공부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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