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전학, 진로, 유학 등등 인생은 수많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이 어려울수록 혹은 간절할수록 같은 경험을 했던 가까운 지인들에게 종종 조언을 구하게 된다. 하지만 겸손하게 조언을 구한다 말하지만 이미 내가 정해놓은 답을 듣고 싶은 내 마음속 모순이 있다.
사실 조언을 해줄 때는 최대한 무심하게 조언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나에 대한 상대방의 과한 애정 때문인지 모험과 힘듦이 예상되는 상황에 대한 조언을 구하게 되면 대게 도전을 지지하기보다는 여지없이 여러 장애물들과 자신이 겪은 최악의 부정적인 경험들만을 들려주어 부질없는 환상은 버리고 지금의 자리가 최고라는 자상한 결론을 내려준다.
20년 전 그날도 그랬다. 퇴근 후 오랜만에 모인 과 선후배들 모임에서 생맥주 500CC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얼큰하게 취했던 나는 용기를 내어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회사 그만두고 유학 가고 싶은데 선배가 다녔던 학교 프로그램 어땠어요?” 힘든 점도 있지만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격려를 받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내 예상과는 적잖이 다른 직언을 듣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짧은 기간에 언어가 늘지 않을뿐더러 다녀와서 지금보다 더 나은 직장을 다시 구하리라는 보장도 없을 거고 지금 내 나이에는 안정된 직장에 다니다가 결혼하는 것이 최고라는 남녀 차별적인 말들을 듣는 순간 내가 괜히 쓸데없는 질문을 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거두어들일 수 없었다.
“ 믿음직한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말처럼 새겨들어야 할 말이었기에 거슬리게 들렸을 뿐이라고 애써 그날의 불편한 마음을 포장했다.
타인의 선택을 같이 책임질 수 없다면, 타인의 일상을 나서서 도와줄 수 있는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타인이 겪어 내야 할 난관에 지나치게 아는 척을 하는 것보다는 무심하게 모르는 척해주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나는 선배의 애정 어린 조언을 따르지 않고 내 계획대로 짧은 유학을 떠났다. 선배의 말대로 최악의 날도 있었고 뜻하지 않은 행운의 날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 결정한 선택이었으므로 불평 없이 쓰디쓴 경험도 기꺼이 감수해냈고 달고 쓴 모든 경험들은 나에게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날의 씁쓸한 경험 이후 나는 조언이 필요할 때는 직접 정보를 찾아보고 내가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 또한 누군가 나에게 조언을 구하려 할 때는 상대방에 대한 과도한 애정이 불쑥 앞서기 전에 최대한 무정한 듯 무관심하게 상대방을 바라보려 한다. 그리고 조언을 구하는 상대방의 의사를 지지해주는 객관적이고 안전한 선택을 한다.
애정이란 사랑하는 마음이다. 걱정하는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의 일부분이지만 상대방을 걱정하는 마음이 지나쳐 편안함과 익숙함에 안주하도록 하는 마음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 어쩌면 고생길 속에 꽃길도 숨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무정에는 따뜻한 정이 없이 쌀쌀맞고 인정이 없음을 뜻하는 부정의 의미가 있지만 관심의 절제라는 무정의 긍정의 의미도 있다. 설령 사랑하는 대상에게 애정과 무정의 균형을 잡는 것이 쉽지 않을지라도 내가 상대방의 선택에 대해 일일이 책임질 수 없다면 적당히 무심하게 상대방의 선택을 믿고 기다리는 연습이 필요하다.
비록 무정하게 보일지라도, 실패가 눈에 보일지라도 그 실패 속에서도 배움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