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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 in Sep 20. 2021

냅도 불소, 지가 알아서 잘 하것제

(넷플릭스) 블랙미러 4, 아크엔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위치 추적이 되는 핸드폰을 사주었다. 집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의 학교를 보내려니 등하교 길에서 무슨 일이 생기지나 않을지 노심초사했다. 아이의 위치를 확인하면서 아이가 어디쯤 가고 있는지 확인해보며 불안을 다스리며 디지털 세상의 편리함에 감탄했다. 게으른 탓에 몇 번 어플의 위치 추적 기능을 이용해 보고 말았지만 아이가 길을 잃어버릴까 걱정이 앞설 때는 무척 유용했다.

 

 1학년이었던 아이가 이제는 고학년이 되니 위치 추적보다는 아이가 어떤 콘텐츠를 보는지, 어떤 검색을 했는지. 게임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혹여 유해사이트를 의도치 않게 접하게 되면 그 충격을 어떻게 달래줘야 하는지 생각하기조차 어렵다. (사실 아이보다는 엄마의 충격이 더 클 것 같다.) 최대한 유해 사이트를 접하는 시기가 늦기를 바라며 영상물에 과도하게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매의 눈으로 아이들의 핸드폰을 열어본다. 어떤 앱을 사용했는지 살피고, 핸드폰 사용 시간을 통제한다. “지금 나의 감시가 언제까지 효과가 있을까, 나는 언제쯤 아이들을 심리적으로 독립시켜야 하나”라는 생각과 회의감이 들 찰나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블랙미러 4, 아크엔젤


 싱글맘인 주인공은 보물 같은 아기를 출산하는 동시에 걱정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세 살 무렵 고양이를 따라가다가 실종될 뻔했다. 그 일은 엄마의 불안을 높였고 결국 최첨단 위치 추적 시스템과 신체정보를 체크할 수 있는 기능이 탑재된 “아크엔젤” 실험대상에 참여하게 된다. 아크엔젤의 획기적인 기능은 아이가 보고 있는 것을 엄마가 모니터링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폭력적이고 유해한 환경에 노출되었을 때는 아이의 시각에 비친 현실 모습이 뿌옇게 블러 처리가 된다. 이 기능은 고객의 옵션이었지만 걱정 많은 엄마는 그 옵션을 선택한다.


아빠: 옛날엔 문을 열고 애들을 키웠었어.
딸(싱글맘) : 아빠가 칸막이를 안 해주셔서 제 팔이 부러지기도 했죠.
아빠: 그 팔은 지금 어떠니?"
딸 : 괜찮네요


 친정 아빠는 싱글맘인 딸에게 모든 것을 차단하기보다는 적당히 세상에 노출하면서도 잘 클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싱글맘인 주인공은 딸아이 세라를 아크엔젤이 사납고, 폭력적인 환경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기대하며 불안을 애써 감춘다.

 

 한편 세라는 아크엔젤의 영상 검열 옵션 때문에 할아버지가 쓰러져도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이 피를 흘리는 사람을 그려도 , 연필로 자신의 손가락을 찔려 자해를 해봐도 아프지만 피를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어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 상황을 알게 된 엄마는 딸 세라를 데리고 상담을 간다. 아이의 과격행동이 폭력성으로 결론짓기보다는 이미 실패한 모델인 아크엔젤의 이식체를 딸의 몸에서 제거는 못하지만 보호자 설정(영상 검열)을 취소할 것을 권유받는다. 딸을 안전망에서 잘 키우고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이제는 세상에 내보내야 할 때임을 받아들이며 "거쳐야 할 일"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크엔젤의 전원을 끄고 깊숙한 곳에 밀어 넣어둔다.

 

 세라는 아크엔젤의 검열 없이도 무럭무럭 성장하여 15살의 고등학생이 된다. 사춘기 딸이 귀가가 늦어지자 걱정이 된 엄마는 다시 아크엔젤을 켜게 되고 딸의 성관계 모습을 보게 된다. 충격을 받은 엄마는 딸의 남자친구를 찾아가서 딸과의 관계를 정리할 것을 요구하고, 임신이 걱정된 엄마는 딸아이 몰래 아침 주스에 긴급 피임약을 넣는다. 엄마가 자신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딸은 배신감에 엄마를 때리게 되고 아크엔젤 모니터로 폭력적인 장면 앞에서 영상 검열은 작동되어 딸 세라는 피 흘리는 엄마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블러 처리가 된다. 피범벅이 된 엄마를 보지 못한 채 세라는 떠나고 엄마는 절규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 <아크엔젤>은 정도를 벗어난 모정에 대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이를 위하는 것일까? 두 아이의 엄마인 내가 아이를 위한다고 여겼던 나의 통제가 아이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부터 앞선다.

 부모는 자식보다 먼저 인생을 산 사람일 뿐 인생의 정답을 알고 있지는 않다. 부모로서 보다 안전한 세상에서 아이를 살게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되나 아이를 통제하며 과잉보호를 하며 키워서는 안 됨을 이 영화는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모와 아이 사이에는 건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지나치게 밀착하여 양육이 간섭과 통제로 이루어질 때 아이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없게 된다.


 아이는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으로 큰다. 아이 스스로 직접 선택하여 경험한 일을 통하여 올바른 판단과 자기 통제력을 배울 것이다. 부모가 할 일은 그저 묵묵히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보여주며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서 넉넉한 품으로 널 믿고 기다리고 있노라고 버팀목의 모습으로 있어주면 되지 않을까?

 

  이론은 쉽지만 조급하고 걱정 많고 고집 센 엄마인 내가 아이와의 건강한 거리두기 실천이 흔들릴 때는 마음속으로 되뇌어보련다.


 “냅둬 불소, 지가 알아서 잘 하것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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