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인연
중국 한나라 사람 추양의 글에서 나오는 구절 [백두여신 경개 여고 白頭如新傾蓋如故]는 사람과의 사귐에 대한 고사성어이다. 머리가 허옇게 될 때까지 오랫동안 사귀어도 여전히 서먹하고 낯선 사람이 있고 잠시 우산을 함께 쓰고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을 뿐인데도 오래 사귄 친구처럼 친밀하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즉 서로 마음이 통하면 길에서 처음 만나 인사하여도 오랜 친구와 같음을 의미한다. 알고 지낸 세월에 상관없이 서로에게 힘이 되고 마음이 통하는 관계를 나는 친구라고 부르고 싶다.
단편 소설 『쇼코의 미소』를 읽고 타국에서 각자의 모국어가 아닌 제2외국어로 나와 따뜻한 우정을 나누었던 그녀가 떠올랐다. 그녀는 내가 지금껏 만났던 사람 중 가장 아름다웠다. 커다랗고 까만 눈, 기다란 속눈썹, 풍성하고 긴 갈색 머리칼은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외모였다. 보수적인 나라 인도에서 온 그녀는 부모님이 올린 신문 결혼 광고를 통해 남편을 만났고 그녀와 나의 남편은 같은 직장을 다니는 직장동료였다.
그녀는 하루 종일 집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나는 오전에 영어를 배우러 학교를 다녔고 수업이 끝난 후 종종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있는 것을 확인한 후 그녀의 집에 갔다. 그녀가 직접 정성껏 만들어준 짜빠띠를 다 먹은 후 영어가 유창한 그녀는 나의 영어 숙제를 도와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서툰 영어로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고 때론 서로의 남편에 대한 흉도 보고 속 이야기를 나눴다.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같은 처지인 서로를 의지했다.
남편 없이는 외출을 꺼려했던 그녀는 총기 소유가 가능한 미국에서 총에 맞지는 않을까 겁에 질린 채 집에만 있었다. 인도에 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연락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내는 그녀가 잘 있는지 마음이 쓰였다. 나는 그녀에게 밝은 햇살도 보여주고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었다. 쓸쓸한 그녀의 얼굴에서 활짝 웃음꽃이 피는 모습을 보면 행복했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24p, 쇼코의 미소)는 마음처럼 그녀의 아름답고 그늘진 모습은 나에게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쇼코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차피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관계의 깊어짐을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물리적 거리와 마음의 거리가 있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는 외국인 친구에게 자신의 감정을 절제할 수 있는 외국어로 편지를 보내며 가끔씩 속내를 조금은 털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와 그녀는 각자의 외로운 시절 속에 만난 시절 인연이었다. 서로의 외국인 친구였던 우리는 비록 모국어로 소통을 하는 것보다는 불편하기는 했지만 마음을 나누기에 언어 실력은 중요치 않았고 오히려 더 빨리, 더 쉽게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어디론가 갑자기 떠나도 이별에 덤덤할 수 있고 큰 기대를 안 해서인지 작은 오해나 실수도 너그럽게 이해되고 때론 누구에게 보다 솔직할 수 있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게 의지되는 소중한 사귐이었다. 다시 만나게 되는 시절이 오기를 희망하기도 하지만 귀중한 시간 함께 좋은 시절을 보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디서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어본다. 그녀는 멀리 있지만 내 마음속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는 친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