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ess Your Heart
미국에 도착한 지 삼 일째에 우리 가족 모두 코로나에 걸려 버렸다. 온 가족이 코선생을 만나고 회복된 이후, 미국에 온 지 딱 2주 만에 첫 동네 산책을 나섰다. 차 안에서 굳이 바깥에 있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지나가다 마주치면 활짝 웃어주며 좋은 하루 보내라고 인사를 한다. 상냥하게 인사하는 이웃들의 모습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무척 어색했지만, 같이 손을 흔들고 인사를 했다. 친절한 아침 인사, 아침 이슬을 머금은 거미줄, 새소리, 다람쥐를 보며 힐링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끔하게 깎아놓은 잔디와 그림처럼 이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네를 걷다 보니 이곳을 떠날 때가 되면 어떤 마음이 들지 궁금해졌다. 세상을 바라보는 나만의 렌즈를 얻으려나? 이 작고 평화로운 마을을 자세히 관찰할 기회를 얻었으니 머무는 동안 이곳을 샅샅이 눈에 담아야겠다.
오후에는 로데오 경기를 보러 나갔다. 가는 길에 농장들이 연이어 나타났고, 동화 속에서나 나올 듯한 끝없이 펼쳐진 푸른 들판의 모습이 매혹적이었다. 어릴 적 재미나게 봤던 초원의 집이 이런 분위기였을까, 영화 세트장 같은 곳에서 살고 있는 헨더슨빌 주민들에게는 흔하디 흔한 모습이겠지만 방문객의 눈에 비친 대자연의 모습은 한참 동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차로 막힘없이 20분여를 이동하니 로데오 경기가 열리는 커다란 공터가 나타났다. 어디서 사람들이 모였는지 주차장에는 차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자 낯설어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낯설기만 하다. 모든 것이 달랐다. 언어, 진한 풀냄새, 흙냄새, 그리고 사람이 특히 달랐다. 온통 백인들이다. 흑인도 드물고 아시아인은 물론 보이지 않았다. 미국에서 인종의 다양성이 이렇게나 부족한 곳이 있다니. 이 사람들은 한국을 알까?
로데오 경기가 시작되기 전에 미국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신나게 로데오 경기를 관람하고 중간에 푸드 트럭에서 음식을 사 왔다. Fried Oreo? 오레오 튀김??? 오레오 쿠키야 누구나 아는 과자다. 하지만 오레오 쿠키로 튀김을 할 수 있단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는데! 맛천재다.
Funnel cake이라는 슈거 파우더를 잔뜩 뿌린 카니발 간식도 먹어보았다. 새로운 음식을 먹으니 미국에 온 것을 실감했다. 로데오 경기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몇 마디 주고받으니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은 걸 오히려 무척 친절하기만 하는데 괜히 쫄았구나 싶다.
나를 작아지게 하는 것은 부족한 내 영어 실력이었다. 영어의 파도가 높을 줄은 알았지만 정말 거의 들리지 않는다. 가끔씩 접하는 웅웅 거리는 듯한 남부 엑센트는 그동안 알고 있던 영어와 많이 달랐다. 죽어라 리듬을 따라가야 단어 하나가 겨우 들릴까 말까였다. 새로운 남부식 억양에 나의 딱 얼어붙은 입은 언제나 떨어질는지. 영어가 기본이니 미국 말부터 열심히 배우자! 쫄지 말자고.
헨더슨빌이라는 낯선 동네로 우리 가족이 오게 된 것은 오랜 세월 알고 지낸 중국인 친구의 다정하고 적극적인 제안 덕분이었다.
나는 짧은 기간 동안 영어에 목적을 두고 미국 문화를 알고자 한다면 이왕이면 한인들이 드문 환경에서 미국 생활을 해보고 싶었다. 근사한 생각 같았다. 게다가 친구가 제시한 렌트비는 빠듯한 예산에 거절하기엔 너무나 유혹적이었다.
나와 20년의 나이 차이가 있는 내 친구의 호탕한 성격을 나는 무척 따랐고, 그녀도 나를 덤덤히 아꼈다. 중국에서 지낼 때 그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데리고 여러 곳을 함께 다녔고, 한 번도 같이 살지는 않았지만 우린 서로가 꽤 잘 맞았다. 내 가족을 데리고 중국 북경의 그녀의 집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그녀의 겨울 휴가지에, 그녀의 미국집에 그녀는 자주 나와 내 가족을 초대했다.
하지만 나 홀로 단기 여행도 아니고, 내 가족들을 데리고 친구집에서 산다니 여러모로 민폐가 될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론 넓은 전원주택에서 혼자 쓸쓸하게 살고 있는 친구에게도, 영어 몰입 환경을 찾고 있는 우리 가족에게도 서로의 악어와 악어새가 되어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여러 날의 망설임 끝에 우리는 한인타운이 잘 조성된 미국의 대도시가 아닌 미국의 시골로 겁 없이 향했다.
그녀는 내 가족에게 미국 문화를 가르쳐 주었다. 하나같이 모두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지만 그녀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우리의 속도로 수수께끼 풀듯 눈치껏 하나씩 알아내고 싶었다. 그게 여행자의 특권이 아닌가? 영원히 미국에서 살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루아침에 미국인 마인드로 바뀌겠는가? 그저 나와 언어도, 문화도, 살아온 환경도 전혀 다르지만 어딘가 통하는 구석이 있을법한 사람들을 만나서 나와 비슷한 점을 발견하거나 나와 다른 삶을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었다.
그녀 앞에만 서면 나는 빨간불에서 신호등을 건너려는 천지분간 못하는 다섯 살짜리 어린이가 되어 혼나는 기분이 자주 들었다. 그녀의 확신에 가득 찬 강요가 숨이 막혀왔다. 오랜 기간 친구 사이였다는 것이 무색할 만큼 한 달 만에 그녀와 단 십 분도 마주하기가 힘들어졌다.
돈을 아끼려던 애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녀와 마주침을 최소화하기 위해 하루 종일 바깥에 있느라 외식비가 많이 들었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느라 사흘에 한 번씩 충전하는 기름값도 만만치 않았다. 하필이면 40년 만에 최대치로 올랐다는 미국의 고물가 시대에 우리 가족이 왔고, 설상가상으로 환율은 1,400원을 넘어갔다. 아! 모든 게 꿈이었으면.
날이 갈수록 그녀의 잔소리가 길어졌다. 집을 나가겠다고 하자 그녀는 갑자기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아이들 학교는 어쩔 거냐며 그냥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여기에 있으며 돈을 아끼라며 다정한 말투와 태도로 나를 붙잡았다. 렌트가 귀한 이곳에서 어디서부터 집을 구해야 할지 몰라서 막막함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친구와의 불편한 동거를 다시 연장했다.
겉만 멀쩡하고 오래된 주택에서 사는 것은 그녀처럼 긴장감이 감돌았다. 균형이 흐트러지면 동작을 멈춰버리는 오래된 세탁기, 돌리는 강도를 조절 못했다가는 손잡이가 빠져버리는 가스레인지. 모든 살림살이가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망가지는 건 아닐까 긴장을 하며 조심조심 사용을 하니 도무지 집에 정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집을 좋아해 보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만 다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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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집 밖에서 일어날 여러 차별을 가장 걱정했건만 친구 집 안이 가장 긴장된 곳이었다. 사람 마음이 그렇다. 큰 일보다는 아주 작은, 들으면 진짜 별거 아닌 '말'에 빈정이 상하면 마음이 뚝 멀어진다. 건강 식단에 몰두하고 있는 그녀의 기준에 달고, 짜고, 튀긴 음식은 철천지원수 같은 음식이다. 내가 만든 미역국을 먹어보고 너무 짜다며 그녀는 양미간을 찌푸렸다. 된장국에서는 이상한 식초 냄새가 난다고 하고, 김치는 짜기만 하지 어떤 건강한 점이 있냐고 따지듯 물어보고, 함께 먹으려고 동네 맛집에서 사 온 도넛을 노려보며 다시는 사오지도, 먹지도 말고 얼른 버리라며 나를 다그치자 그녀에 대한 내 마음은 심층 해저까지 뚝 떨어져 버렸다.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그녀와 밥을 먹지도 중국어로 소통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미국이 아닌 중국에 있는 지인들과 아침저녁으로 매일 세 시간 이상씩 통화를 했다. 우리 가족이 오고 나서 그녀의 통화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 것을 보니 우리가 불편한 만큼 그녀도 불편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좋겠다. 그녀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우던 시절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묘하게 가슴을 후벼 팠다.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 나에 대한 그녀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짐작과 기대와 실망만이 서로가 느끼는 공통된 감정이었다.
반면 집 밖을 나가면 사람들은 친절했다. 드라이브스루에서 주문한 아이스커피가 아이스티로 나온 적이 있다거나 아메리카노를 발음하기 위해 점원에게 여러 번 아메리카노라고 말을 한 정도가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녀의 렌즈를 통한 미국은 엄격했지만, 아이들과 다니면 이 지역의 사람들은 우리 가족에게 놀랄 만큼 부드럽고 상냥했다.
알아주지도 않고, 나무라기만 하는 친구의 마음이 바뀌기만을 기다렸다가는 이곳의 시간은 유배지와 다름없을 것이다. 이 난국을 꼭 극복해야 한다. 우선 낯설고 어리둥절한 이 지역 사회에 속해야겠다. 그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알고 싶다. 어떻게?
아이들의 학교를 등록하고, 입학 설명회와 Meet The Teacher's Day, 학교 PTO에 참석하며 첫째 학교 운동팀에 축구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도 축구팀에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해서 트라이아웃에 참가하였다. 20명 모집에 무려 65명의 지원자가 축구 트라이아웃에 왔고 아이는 1차 트라이아웃 후 통과했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기쁨도 잠시 2차 트라이아웃에서는 플레이는 훌륭했지만 다음 기회에 라는 메시지를 받았다. 사실 체격에서도, 기본기에서도 아이는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학교 오피스에 방문했다. 어떤 운동 종목에 참여 가능한지 문의를 해보았다. 현재 참여 가능한 종목은 크로스컨트리라고 했다. 코치 선생님한테 연락을 원하냐고 물어보길래 오피스에 내 번호를 남겨놓았다. 그런데 크로스컨트리는 어떤 운동이지? 동계 올림픽에서 들어본 것도 같은데 스키인가?
다음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크로스컨트리 팀코치였다. 굵은 중저음의 동굴 보이스에 남부 사투리의 영어 조합은 리스닝 난이도 (上)이었다. 직접 만나서 상담을 원하냐는 말을 간신히 알아듣고 즉각 Yes!라고 대답했다.
헤비메탈 그룹 메탈리카의 리드 싱어 제임스 핫필드를 닮은 장신의 남자 선생님이 다가와 자신을 XC 팀 코치라고 소개했다. 양팔에 문어와 커다란 피닉스가 그려진 코치 선생님의 문신을 보며 무슨 말을 시작해야 할지 너무 어색했다. 사실 운동 종목이 무엇이든 중요치 않았다. 크로스컨트리라고 하더니 XC는 무엇인가? (크로스컨트리라고요? 스키는 들어봤습니다. 8월 말의 날씨는 아직 뜨거운데 어디서 스키 연습을 하나요? 하하! 농담을 하려다 잠자코 있었다) 크로스컨트리는 어떤 운동이냐고 물어보니 야외 단거리 마라톤, 쉽게 달리기라고 했다.
이것은 운명이다. 어릴 때부터 늘 뛰어다니기를 좋아한 첫째에게 멈춰! 달리지 말라고를 수천 번, 수만 번을 외쳤는데 제대로 달릴 판이 미국에 오니 벌어지다니. 아들아, 원 없이 뛸 수 있으니 좋겠네. 운동하면서 친구도 사귀고, 영어도 배우고 딱이다. 코치가 직접 아이를 보고 싶다며 수업하고 있는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의 몸을 쓱 훑어보더니 “You’re runner’s body”라고 하자 아이는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코치는 아이에게 오늘 방과 후에 트라이아웃을 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고, 아이는 얼결에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테스트가 끝나자 코치는 아이가 충분히 뛸 수 있을 것 같다고 했고, 매일 방과 후에 두 시간씩 연습을 한다고 했다. 운동장을 끼고 오르막 내리막 3km를 달릴 것이고, 금요일에는 학교 근처에 있는 산속에서 달리기 연습을 한다고 했다.
“아! 장난이 아닌 것 같은데. 아들아, 할 수 있겠어?"
첫 연습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연습을 하는지 보러 갔다. 맙소사! 백설기처럼 하얀 아이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릴 때부터 병치레가 많아 늘 걱정이 많았는데 버텨낼 수 있을까? 집에 돌아와서 너무 힘들면 걸어도 되니깐 힘들면 꼭 코치 선생님에게 얘기하고, 컨디션 조절해서 뛰어라고 신신 당부했다. 아이는 “엄마, 나 이 운동 안 할래. 너무 힘들어. 입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아.”라고 했지만 그래도 일주일만 해보고 결정해 보자 했다.
아이의 퍼포먼스에 대해 할 말이 있으니 학교로 오십시오.
다음 날 연습 중간에 코치에게 문자가 왔다. 무슨 문제가 생겼나???? 아이들의 연습이 끝났고 남자 코치는 슈퍼모델 신디 크로포드를 연상시키는 긴 생머리의 여자 코치까지 대동하여 교실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치는 연습이 끝나고 온 아이가 자리에 앉자 책상에 구글 번역기 앱을 열어 놓고 천천히 또박또박 말을 꺼냈다.
"크로스컨트리는 많이 뛰고 적게 걷는 운동입니다. Sam는 오늘 대부분의 연습을 걸었고, 정해진 구간을 가지 않고 가로질러버렸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내년에 다시 도전해도 됩니다. "
코치의 단호한 말이 끝나자 한국에서처럼 아이를 과보호를 하려던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 갑자기 화끈거렸다. 코치와의 미팅 이후로 나는 어리광을 부리려던 아이의 응석을 받아주지 않았고, 아이도 정신이 바짝 들어서 본격적으로 친구들 그룹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열심히 달리게 되었다.
크로스컨트리와 함께 비로소 헨더슨빌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감지했다.
"Bless your heart"는 미국 남부에서 자주 쓰는 표현으로, 상황에 따라 여러 의미가 있습니다. 누군가 내가 실수한 것을 보고 이 말을 했다면 꼬아서 모욕하는 것이니 절대로 땡큐 하면 안 됩니다. (머리는 장식이냐? @&₩7&@!!!?!!)
1) 친절하게 위로하거나 격려할 때
Trying to understand the Southern accent can be so hard. Bless your heart, you're really making an effort to learn
(남부 억양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데요. 정말 노력하고 계시니 대단해요.)
2) 때때로 조롱하거나 누군가가 어리석은 행동을 했을 때:
You thought fried Oreo was a strange idea? Bless your heart, you really are new to the South.
(오레오 튀김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요? 아휴, 정말 남부에 처음 오셨군요.)
My friend tasted the seaweed soup I made and said, 'Bless your heart, how can you eat something so salty?
(내가 만든 미역국을 맛본 친구가 “참나” 넌 어떻게 이렇게 짠 걸 먹을 수가 있니?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