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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Mar 22. 2024

나 홀로 골프장에 서서 (2)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드디어 나 혼자 필드 가는 날.


며칠 전 호기롭게 멤버십을 결제한 직후 골프장 직원분으로부터 '혼자 오면 다른 사람과 조인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헉! 사방 둘러봐도 평일 오전 골프장에는 미국인 할아버지 할머니들밖에 안 보이는데. 영어도 골프도 초보인 상태로 모르는 미국인과 스몰 토크를 하며 골프 칠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몸이든 머리든 한 번에 한 가지만 써야지, 무리하다가 병나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그래서 계속 예약을 주저하다가 자꾸만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까워 어느 날 그냥 덜컥 전화로 부킹을 해 버렸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얼른 해치워버리자. 그리고 필드 가기 전날에 계속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제발 내일 저 혼자 치게 해 주세요. 아니면 아주 친절한 미국인을 만나게 해 주세요.


당일 오전, 예약 시간보다 삼십 분 먼저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다시 한번 기도를 하고, '생애 두 번째 필드를 혼자 나오다니, 장하다 밍이야!' 하고 나 자신을 힘차게 격려하면서 체크인을 했다. 다행히 오늘은 혼자 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내 앞, 뒤타임에 사람이 없으니 예약시간보다 먼저 나가서 천천히 쳐도 된다고 했다. 이 골프장은 cottage 코스 9홀, lake 코스 9홀, road 코스 9홀로 이루어져 있는데 cottage 코스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다행히 이전에 가 보았던 코스였다.


카트를 운전해서 1번 홀로 간 것까지는 좋았으나 레이티 티박스가 안 보인다. 근시에 노안까지 겹친 눈은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고르게 안 보여서 문제란 말이야. 여차저차 찾은 뒤 남의 귀한 골프장 잔디 다 줘패가면서 스윙 몇 번 날려주고, 종국에 그린에 공을 올린 것에 만족하면서 3번 홀까지 진행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3번에서 4번 홀까지 가는 길을 도저히 찾지 못하겠는 것. 심한 길치인 나는 혼자 골프장을 가는 게 두려웠던 가장 큰 이유가, 골프 룰을 모른다거나 공이 안 뜬다거나 혼자 오는 게 처량해 보인다는 등등의 것이 아니라 길을 잃을까 봐였다. 그리고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나중에 알고 보니까 3번 홀과 4번 홀 사이에는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큰 대로가 있어서 거기를 가로질러 가야 하는데 그걸 몰랐던 것이다.


일단 카트길 따라 한 번 주욱~ 나갔더니 한 바퀴 돌면서 다시 제자리로 왔다. 두 번째에는 큰 대로를 따라 운전해 봤더니 어라? 골프장이 점점 멀어지면서 집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맞은편에서 자동차가 오는 것을 보면서 아무래도 이런 길을 카트 타고 달리는 건 아닌 듯하여 황급히 3번 홀로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눈에 띄는 길은 사람이 걸어 다닐만한 오솔길. 아무래도 카트길은 아닌 것 같지만 이제 안 가본 곳은 거기밖에 없다. 카트를 몰고 전진하다가 결국 길이 좁아지면서 카트가 가파른 비탈길에 비스듬히 올라타버렸다. 계속 진행하다가는 뒤집어질 거 같아서 멈추고 후진하려 했는데 아뿔싸! 카트는 후진이 안 되는구나. 내려서 후진 방향으로 카트를 밀었는데 아무리 힘을 주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아아 어쩌지... 식은땀이 난다. 다시 카트를 타고 앞으로 진행하거나, 여기서 멈추고 전화로 골프장 사람을 불러 도와달라고 하는 것 중 선택해야 하는데. 그냥 진행하자니 전복사고가 두렵다. 죽지야 않겠지만 얼마나 다칠지, 카트가 고장이라도 나면 얼마를 물어줘야 할지. 그렇다고 전화로 사람을 부르자니 이 상황을 또 뭐라 설명해야 할까. 나는 리치몬드 해 밝은 낮에 골프장에 홀로 서서 7번 아이언 옆에 차고 깊은 시름에 잠겼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역시 기도밖에 없다. 하나님~ 하고 부르며 기도를 하는데 마음의 음성이 이렇게 들렸다. '제가 오지에 선교하러 가다가 전복사고가 난 것도 아니고, 골프장에서 카트 뒤집어져서 사고 나면 너무 창피할 것 같은데요;;;;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카트 뒤집어지지 않게 해 주세요.' 이 상황에서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것이 창피함이라니, 갑자기 웃음이 나오더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그리고 기도를 마친 뒤 카트 위에 올라타서 엑셀을 풀로 밟고 달려버렸다. 카트는 우우웅~ 소리를 내며 경사진 비탈길을 단숨에 올라가 길 위에 멈췄다. 성공! 하나님, 감사합니다.


4번 홀은 포기하고 길 따라오다 보니 처음 들어왔던 1번 홀 근처에 있는 9번 홀이 보였다. 아아 1, 2, 3번 다음에 9번 홀로 마감해야 하다니. 잠시 슬퍼했으나 어차피 나는 비기너. 한 홀을 여러 번 치는 것도 연습이 되겠지라는 생각에 9번 홀에서 퍼터까지 야무지게 치기를 세번쯤 반복하고 내려왔다.


그리고 카트를 반납하고 생각에 잠긴다. 오늘 고생한 것과 별개로 역시 필드에 나오는 것은 좋다. 내일도 또 오고 싶다. 그렇지만 내일도 또 4번 홀을 못 찾고 오늘처럼 돌 수는 없다. 게다가 내일은 내 앞뒤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다.


그래서 카운터에 가서 지도를 한 장 얻은 뒤 이번에는 카트를 타지 않고 1번 홀부터 순서대로 걸으면서 길을 익혀보기로 했다(이 골프장은 카트를 타도 되고, 걸어서 이동해도 된다). 나는 마치 대동여지도를 만드신 김정호 조상님의 심정으로 모든 지형지물을 유심히 살피며 걸었다. 음 저기 티박스가 있군. 홀의 깃발은 어디지?


그렇게 9번 홀까지 걸으면서 문제의 그 3번과 4번 사이 길까지 완벽하게 익히고 나자 그다음 날은 1번부터 9번 홀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중간에 역주행을 한 번 했다가 마주 오던 미국인 할아버지들이 친절히 길을 알려준 것은 비밀 ㅋ).


게임을 마치고 의기양양한 기분으로 카운터에 가서 그다음 날 티타임을 예약하려 하자 내일은 예약이 많아서 다른 사람과 조인해야 한단다. 오 노! 일단 됐다고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하루 쉬고 나자 몸이 근질근질하다. 그래, 앞서도 말했지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언젠간 해야 할 일, 얼른 해치워버리자.


그리고 예약 당일. 카운터로 갔더니 길가에 서서 몸을 풀고 있는 키 큰 백인 남자를 가리키면서 오늘 저 사람과 조인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아아, 친절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걸리기를 기대했건만, 저 사람은 어쩐지 새침할 거 같은데. 뭐 어쩔 수 없지. 일단 먼저 가서 미리 준비한 인사말을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밍이입니다. 저는 골프 초보이고 영어를 못 합니다. 혹시 제 플레이가 너무 늦거나 방해가 된다면 알려주세요." 그는 쿨하게 오케이~ 했다.


그리고 시작. 미국인들은 스몰톡을 좋아한다고 해서 말 걸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도 말이 없어서 중간에 '내가 말 걸기 싫을 정도로 추레한가? 이거 봐. 나도 한국에 가면 이렇게 못생기지 않았어. 내가 에어랩이랑 화장품을 다 한국에 두고 와서 말이야.'라고 설명하고픈 욕구가 들 정도였다. 눈 밑에 자외선 방치패치를 붙이고, 날이 추워서 콧물을 찔끔찔끔 흘리면서, 미국 세탁기에 몇 번 돌리니 너덜너덜해진 레깅스를 입고 있어서 괜히 주눅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ㅋㅋ


오히려 말을 걸 필요가 있었던 것은 나였다. "제 공이 어디 있는지 보셨습니까?", "레이티 티박스는 어디입니까?", "깃발이 안 보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치면 됩니까?" 그때마다 그는 (속으로 뭐라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쉬운 영어로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오늘따라 처음 간 코스여서, 그가 없었다면 헤맬 뻔했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내가 채를 휘두르는지, 채가 나를 휘두르는지도 모르겠더니 조금씩 지나니까 익숙해지고, 9번 홀을 다 돌 즈음에는 편안하게 내 플레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9홀을 돌러 가는 그에게 '오늘 함께 해서 즐거웠다'고 말하면서 쿨하게 헤어졌다.


모르는 미국인과 골프 치기도 별 거 아니구만. 미국에서 골프 치기의 가장 큰 관문을 통과했으니 이제 남은 기간은 즐기는 일만 남았구나. Enjoy your time!




* 부분은 이순신 장군의 시조를 패러디하였습니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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