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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Mar 22. 2024

나 홀로 골프장에 서서 (1)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기

몇 년 전부터 남편은 꾸준히 내게 골프를 배울 것을 권했다. 나이 들어 부부가 같이 즐길 수 있는 취미로 그만한 게 없다는 이유였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혼자 밖으로 돌려하지 않는 남편이 기특(?)하면서도, 일하랴 애보랴 골프 칠 시간이 어디 있냐는 생각에 계속 거절하곤 했다. 골프 칠 시간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 하나 더 보겠다. 친한 친구들 만나서 수다 떨 시간도 없는데.


그러던 작년 초여름, 남편과 함께 주말 축구클럽에 다니는 아이를 데리러 가던 길에 축구클럽 옆에 새로 오픈한 골프연습장에 붙어 있는 광고를 보았다. '아이와 엄마가 함께 배우는 골프O 패밀리 클럽'


그 문구를 본 남편은 홀린 듯 연습장 문을 열고 들어가, 말빨이 너무 좋아서 도리어 신뢰가 안 가는 사장님과 한참 얘기를 나누더니 나와 제대로 된 상의도 없이 덜컥 그 자리에서 아이와 나의 26회 레슨권을 일시불로 결제해 버렸다;;;; 아아 이 인간...


무르고 싶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 게다가 "소망이가 어릴 때 다양한 경험을 하면 좋잖아. 소망이 배울 때 심심하지 않게 같이 따라가는 정도로 해."라는 말에 '그래. 운동은 어릴 때 배워두면 좋다는데. 소망이를 위해서라면야.'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하기로 결정.


하지만 축구, 농구, 야구 등 친구들과 실컷 뛰어놀면서 함께 어울리는 운동에 심취해 있던 아이가 나 홀로 채를 쥐고 같은 자세를 수십 번 반복하면서 자신과의 싸움을 하는 골프가 마음에 들 리 없었다. 골프채를 야구방망이 잡듯 하고 스윙할 때 한 다리 올리기를 몇 번 하다가 결국 아이는 '재미없다'며 도망치고, 그 자리엔 십여 회의 레슨권과 함께 나만 남았다;;;


이미 낸 돈을 날릴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배우긴 했으나 나 역시 지하 1층 어두컴컴한 골프연습장에서 퍼런 스크린 화면을 보면서 같은 자세를 수십 번 반복하는 골프가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남은 횟수만 다 채우면 그만둬야겠다고 맘먹던 찰나에 미국 연수 발표가 있었고, '미국 가면 골프 안 치는 사람 없다'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근근이 레슨을 이어갔지만 그마저도 연수준비에 바빠서 어영부영하다가 결국 필드 한 번 못 나가보고 출국하게 되었다.


남편은 '미국 가서 꼭 골프를 마스터하고 오라'며 손수 내 골프가방을 사서 각종 물품을 채워주었지만, 국내 연습장에서 7번 아이언만 휘두르던 내가 어떻게 갑자기 혼자 필드에 나가냐고요. 몇 다리 건너 아는 분들이 '필드 기본기만 갖춰지면 팀에 끼워주겠다'고 하셨으나 그 기본기도 일단 필드에 나가야 갖춰지는 것 아닌가요;; 내 귀에는 '경력 있는 신입사원 채용공고'처럼 들렸다.


그렇다고 비싼 돈 들여 레슨 받고 가방에 채까지 마련했으니 안 할 수도 없고, 골프가 마치 숙제처럼 느껴졌다. 남편은 내가 미국에 도착한 후에도 매일같이 골프 언제 나가냐고 성화였다. 한국에 비해 미국에서 골프가 얼마나 싼 줄 아냐고, 얼른 골프장 멤버십을 끊어서 자주 나가는 게 돈 버는 거라고. 돈을 쓰고도 돈을 버는 셈이라니 이 무슨 기적의 계산법 같은 소리냐고 응수했지만 나도 안다, 여기가 골프 치기에 최적의 환경이라는 것을.


결국 큰맘 먹고 같은 한인 교회에 다니고 앞집에 사시는 (이 놀라운 인연은 나중에 또 서술하기로 한다 ㅎㅎ) 한국인 부부가 골프장에 자주 나가신다는 것을 알고 나도 한 번 끼워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리고 처음 간 골프장.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카트를 타기 전까지는 좋았으나 그 뒤는... 공은 하나도 안 뜨고, 어쩌다 멀리 간 공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캐디 없는 미국 골프장에서 카트 운전하랴, 공 찾으랴, 채 휘두르랴, 정신이 혼미할 지경. 게다가 언제 이렇게 저질체력이 되었는지 공과 공 사이를 걷는 것도 계속 반복하니 숨이 차오른다. 그리고 그날따라 날씨는 왜 이리 추운지. 덜덜 떨면서 3홀 정도 치고는 아직도 남은 홀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에 아연실색.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좋았다. 드넓은 들판 위에서 상쾌한 바람을 맞는 것이, 고르게 다져진 잔디밭 사이를 두 발로 걸어 다니는 것이, 어쩌다 잘 맞은 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궤적을 그리는 모습을 보는 것이. 하늘은 어쩜 그렇게 푸르고, 공기는 어쩜 그렇게 맑은지.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왜 그리 좁은 국토, 그것도 70프로가 산지인 나라에서 다들 골프를 치지 못해 안달인가 했는데, 그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여차저차 9홀까지 끝내고 앞집 부부에게 감사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이제부터 고민 시작. 오늘 갔던 골프장은 1년 회원 그린피가 연 1,200불밖에 하지 않는다. 나는 10개월밖에 있지 않기 때문에 시작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이득이다.


그런데 혼자 골프장에 갈 수 있을까? 리치몬드에 나처럼 단기 연수를 온 한국인 가정이 몇 있지만 필드에 나가는 집은 많지 않다. 그리고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부부와 아이까지 온 가족이 와서 지내고 있다. 물론 모두들 내게 친절하고 필요할 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주시기 때문에 끼워달라고 하면 언제든 지만, 내가 끼어들어 가족끼리, 부부끼리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거슨 마치 눈치 없이 커플 사이에 끼어 노는 모쏠 친구가 되고 싶지는 않은 심정과 비슷하달까(혼자 아이 데리고 해외 나오신 분들은 어떤 마음인지 아주 잘 아실 것이다. ㅎㅎㅎ).


그렇다고 혼자 골프장에 가는 것이 두려워 이 좋은 것을 포기할 것인가. 뭐... 생각해 보나 마나 답은 뻔하다. 애초에 나는 장애물이 있다고 하고 싶은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는 것이다. 혼자면 어때. 여태 혼자서 그 많은 일을 해 왔는데, 골프쯤이야. 내가 홀로 오직 주만 의지하여 사망의 골짜기와 사막 같은 광야도 많이 해쳐 나왔는데 그에 비하면 골프장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지.


갑자기 골프장에서 하나님과 독대할 생각을 하니 기대감이 솟는다. 태양 아래 광활한 잔디밭에서 하나님과 둘이 보내는 시간을 골프장에서 가질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멋진 일이 있을까. 결국 그 길로 달려가 골프장 1년 회원권을 결제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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