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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May 19. 2024

한국 가고 싶은 날

아이와 단둘이 미국 정착

“엄마, 나 오늘 학교 못 가겠어. 발목이 너무 아파.”

아이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말했다.

심장이 철렁했다. 결국 올 것이 온 걸까.     


미국에 도착한 뒤 얼마 안 되고부터 아이는 종종 발목이 아프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별 이상은 없어 보이길래, 아이는 아프다면서도 곧잘 놀길래 잠시 지나가는 성장통이겠거니 했다.      


솔직히 회피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미국 의료 안 좋다는 얘기는 한국에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와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직접 확인하니 생각보다 심각했다. 교통사고가 나서 손에 유리 파편이 우수수 박혔는데도 병원에서 안 빼줘서 집에서 바늘로 빼고 있다는 얘기, 아이 귀에 모래가 들어가서 병원에 갔는데 모래를 다 빼주지도 않고 400불을 청구하더라는 얘기, 모두 내가 직접 아는 사람들이 직접 겪은 것들이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어휴, 무서라. 나는 한국 돌아갈 때까지 병원 근처에 가지도 말아야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끔씩 아이가 발목이 아프다고, 어떤 날은 (그렇게 병원을 싫어하는 아이가 스스로) 병원에 가 보고 싶다고 할 때마다 정성껏 발목에 파스를 바르고 마사지를 해 주면서 “괜찮을 거야. 미국 병원은 치료도 잘 안 해준대.”라고 달랬다. 그러다 결국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것도 내일이 학교 필드데이(운동회)인데.      


이제는 병원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혼자 가려니 엄두가 안 난다. 영어가 짧아도 다른 대화야 대충 눈치껏 되지만 병에 관한 것은 정확히 들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한인교회에서 친해진 분께 도움을 요청했고, 그분은 바로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 감사.     


그분 설명에 의하면 미국에서 정형외과에 가서 발목 엑스레이를 찍어보려면 먼저 패밀리 닥터를 만나서 전문의에게 갈 만큼 심한 상태인지 확인하고 소견서를 받아야 한단다. 그런데 패밀리 닥터들은 이미 환자가 충분해서 나 같은 단기거주자는 받지 않는 경우가 많고, 겨우 패밀리 닥터를 만나도 별 이상 없어 보이면 그냥 돌려보내는 데다가, 만에 하나 소견서를 써준다 해도 그때부터 정형외과 진료 예약이 될 때까지는 석 달 이상 걸린다고 한다. What?      


그래서 결국 응급으로 봐주는 Urgent Care나 Patient First 같은 곳으로 가기로 했다. 구글맵을 찾아서 집에서 가장 가까운 Patient First에서 한인교회 분을 만나기로 하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집을 나섰다.     


응급진료소는 예약을 받지 않아서 일단 가서 접수 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고 들었지만, 다행히(?) 아이가 학교를 결석하는 바람에 평일 아침 일찍 가게 되어 금방 진행되었다. 접수를 하고 간호사에게 아이 증상을 설명하고 엑스레이를 찍을 때까지 한인교회 분이 유창한 영어로 도와주시는 것을 들으니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데 엑스레이 결과를 보기 위해 대기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의사가 오지 않는다. 어쩐지 일이 수월하게 착착 진행된다 했다;;; 기다리지 않으면 미국이 아니지. 한인교회 분은 오전 일정이 있어 바쁜데도 시간을 쪼개서 와 주신 것이어서 얼른 돌아가셔야 했는데, 가실 시간이 다 되도록 의사가 오지 않으니 마음이 초조했다. 아아, 어쩌지? 의사를 만나는 순간이야말로 도움이 필요할 때인데. 병의 원인과 처방을 정확히 들어야 되는데.      


결국 한인교회 분은 시간이 되어 떠나시고 아이와 나만 남았다.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있다가 대면한 의사는 엑스레이 결과 뼈에는 이상이 없고 애드빌인가 뭔가 약을 일주일간 먹으라고 하는 것 같다. 내가 몇 번을 다시 물으니 종이에 약의 이름과 용량을 적어 주었다. 왜 아픈 건지는 제대로 못 알아들었다.     



진료비와 엑스레이 촬영비 합쳐서 거진 250불을 내고 병원을 나왔다. 이제 약국을 가야 한다. CVS가 약국이라고 들어서 찾아봤더니 타겟 마트 안에 있길래 내친김에 거기서 장도 보기로 했다. 아이가 아파서 하루종일 집에 있을 테니 삼시 세 끼를 집에서 해결해야 한다.      


미국에서 차에 아이를 혼자 두면 불법이라길래 아픈 아이를 데리고 내려 조금씩 부축하면서 마트 안으로 들어섰다. CVS 접수센터에 약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처방전처럼 내밀었더니 여기서 조제받는 게 아니라고, 저쪽 진열대로 가보라고 했다. 내가 제대로 못 알아듣자 나를 데리고 직접 진열대로 가서 약을 찾아주었다.      


여차저차 약도 사고 장도 봐서 마트를 나왔지만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애가 아픈 상황에서도 병원이나 약국에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하는 내 무능력이 답답하면서 기운 빠진다.      


솔직히 그간 미국생활이 너무 즐겁다고 생각했다. 가끔씩 힘 빠지고 서러운 날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대만족이었다. 한국에서 격무에 시달리다가 여기서는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기에 솔직히 미국이 아니라 어디라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정말 한국에 가고 싶다.      


- 아이가 아프면 당장 전문의에게 데려가 진찰받게 하고 싶다.

- 아이가 왜 아픈지, 어떻게 하면 좋아지는지 분명한 모국어로 듣고 싶다.

- 왜,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의사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싶지 않다.

- 아픈 아이를 데리고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서, 차에 아이 혼자 두지도 못한 채 같이 내려서, 절뚝거리는 아이를 부축하면서 약을 사고 장을 보고 싶지 않다.

- 세금과 팁까지 보태면 눈덩이처럼 값이 불어나는 우버이츠 대신 로켓배송과 배민으로 문 앞에서 배달받고 싶다.


오늘 일만이 아니다. 매달 55불씩 내고 있는 인터넷 와이파이는 자주 끊기고, 가스는 오토페이를 신청했는데도 뭐가 잘못되었는지 수동 지불할 것이 있다고 연체료 고지서가 날아온다. 이런 것들도 다 지긋지긋하다.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내 영혼이 저도 모르게 순간 이동한다. 집에서 걸어갈 거리에 있던, (운동을 좋아하는 아이가 다칠 때마다 가던) 정형외과로 가는 길을 걷는다. 진료를 보고는 1층에 있는 약국에 들른다. 그다음 그 옆에 있는 일식당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연어초밥과 내가 좋아하는 대구탕을 포장해야지, 돌아오는 길에 있는 초등학교 앞을 지날 땐 아마 아는 얼굴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아이는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고, 아픈 발목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놀고 싶다고 조르겠지. 그립다, 그곳.      


이런 생각으로 침울해지려는 순간 마음을 다잡았다. 하나님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빌립보서 4:4)”고 말씀하셨다. 어차피 나는 일 년도 못 되어 돌아갈 것이고, 지금처럼 해외에서 장기 거주할 기회는 다시 갖기 어려울 것이다. 이 기간을 기쁨으로 보내는지, 낙심으로 보내는지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려 있다.     


낙심되는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감사밖에 없다.

- 아이 엑스레이 결과 뼈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병원 진료를 도와주시는 분을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이와 하루 동안 집에서 쉬면서 보낼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이가 다른 곳은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다행히 아이는 약을 먹은 뒤 통증이 훨씬 가라앉았고, (쉬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우겨서) 다음 날 필드데이에 참석했다. 혹시 아프다고 하면 집에 데리고 오려고 중간에 참관을 갔더니, 발목에 감아 준 보호대를 차고 신나게 놀고 있다. 나중에 들으니 달리기 대회에 기어이 참가를 해서 일등을 했단다. 짜식... 어제의 결석은 오늘의 필드데이를 즐기기 위한 큰 그림이었냐. 걱정했던 것이 무색해서 허탈하기도 하고, 안심도 되었다.     


그래, 나도 이제 슬슬 인터넷 회사와 가스 회사에 연락을 해봐야겠다. 되든 안 되든 영어로 딪혀봐야지. 그리고 이미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남은 기간 동안 들을 수 있는 영어회화 수업도 좀 찾아봐야겠다. 안 해서 그렇지 어쩌면 생각보다 금방 늘 지도 모른다.     


결국은 Carpe Diem!                         





ps. 해외로 이민 와서 생활하시는 모든 분들을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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