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예전에 기도하다가 감동이 와서 하나님께 외친 적이 있다.
"주여, 저에게 한 번에 수백, 수천을 구원할 수 있는 은사를 주소서!"
나는 이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한 영혼도 제대로 품지 못하면서 어떻게 수백, 수천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먼저 한 영혼을 온전히 섬기는 법을 배워라."
뭐...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으니(마 16:26)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다소 힘이 빠졌다. 큰 은사를 가진 능력자가 되고 싶다거나, 유명한 평신도 사역자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극강의 효율을 추구하는 인간이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단어들 중 제일 좋아하는 것을 꼽으라면 믿음, 소망, 사랑... 이런 것들이 아니라 '효율'을 떠올릴 정도로. 아아, 듣기만 해도 얼마나 설레고 짜릿한 말이던가. 그래서 이왕 평신도 사역을 할 거면 최소한의 노력을 들여 최대한의 효과를 낼 수 있도록 단번에 우르르 열매를 딸 수 있는 일을 하기 바랐다. 모임을 한 번 해도 많은 사람들이 오기를, 글을 한 편 써도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내심 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대로 철저히 나의 기대를 꺾으셨다. 기껏 공들여 조직한 기도 모임의 초청에 단 한 사람만 응했을 때 실망하는 내게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모임을 하라'고 말씀하셨고, 오직 주의 뜻에 따르기 위해 정식 책 출간 기회를 걷어차고 그 대신 기고 요청을 받은 잡지가 도대체 독자가 있기나 한지도 의심스러운 자비출판 잡지였을 때 실망하는 내게 '네 글을 그 출판사의 편집자가 읽고, 인쇄자가 읽을 것이다. 그것으로 만족해라.'고 말씀하셨다.
눼눼... 그럽지요. 다소 불만스러운 마음이었으나 그래도 때마다 순종하자 하나님께서는 그 일들을 통해 내게 은혜를 부어 주셨고, 나는 점차 한 사람을 위한 섬김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내 사역의 결과에서도 자유로워졌다. 그저 내가 제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랐는가에만 집중하고, 누가, 몇 명이 오든, 은혜를 받든 못 받든 신경쓰지 않게 되었다.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사도행전 16:22~25)
주일설교 말씀으로 사도행전 16장을 묵상하고 있을 때였다. 궁금한 것이 생겼다.
바울은 로마시민권자라 재판 없이 매를 맞거나 옥에 갇히는 것을 거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동이 났을 때에는 로마시민권을 내세워 매를 피했다(사도행전 22:25). 그런데 왜 여기서는,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매를 맞고 옥에 갇혔단 말인가?
물론 하나님의 계획은 그 옥의 간수를 구원하는 것이었다(사도행전 16:33). 그러나 바울은 매를 맞는 시점에서는 그것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왜 매를 피하지 않았는가? 성경에 자세한 이유가 나오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짐작컨대 바울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성령께서 명하셔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자처했다. 간수,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생각해 보면 그런 일들은 성경 곳곳에 있다. 예수님은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사마리아 여인, 그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사마리아로 통과하셨다(요한복음 4:4). 마리아는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해 그 비싼 향유옥합을 깼다(요한복음 12:3). 이것은 효율을 따진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할 시간에 자신 앞에 모여든 수백, 수천의 군중들에게 연설을 한 번 더 할 수 있었고, 마리아는 (유다의 비난이 아니더라도) 향유옥합을 팔아 더 유용한 데 쓸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오직 사랑으로만 할 수 있다. 단 한 사람, 그 한 영혼을 위한 사랑. 그 사랑은 기꺼이 비효율을 감수하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자원해서 하게 한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헨리 나우웬이 말년에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중증 장애인인 아담 한 사람의 보조자가 되었을 때 그의 동료들이 '네 학위와 능력을 허비하고 무슨 아까운 짓을 하는 거냐'고 비난했던 것처럼.
그러니 고린도전서 13장은 다시 씌여야 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가 아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비효율을 감수하고..."로.
그리고 우리가 한 사람만을 위한 사랑으로 기꺼이 비효율을 감수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풍성한 열매를 허락하신다. 간수 덕분에 그 가족들도, 사마리아 여인 덕분에 그 동네 사람들도 모두 구원받았고, 마리아의 향유옥합은 헌신의 상징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영원히 남게 되었다. 헨리 나우웬도 자신이 섬기려던 아담으로부터 오히려 큰 깨달음과 사랑을 받고 충만해졌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사역하는 많은 사람들이 효율을 따지지 않고 기꺼이 한 사람을 위한 섬김을 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게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