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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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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Mar 06. 2021

반찬가게 아줌마의 오징어볶음

그녀는 반찬가게 앞에 멈추어 섰다. 슈퍼를 오가는 길에 지나며 눈으로만 보던 곳이었다. 가게의 낡은 외양도 그렇고, 난전처럼 반찬을 주욱 늘어놓고 덮개도 없이 파는 것도 그렇고, 위생에 문제가 있을 것만 같아서 그닥 사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근처 반찬가게는 여기 하나뿐이었으니.


워킹맘인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친정엄마와 6년이 넘도록 함께 살았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육아 독립'을 외치며 친정엄마를 보내드린 것까지는 좋았으나, 육아 독립에 세트로 딸려오는 '가사 독립'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큰 실수였다. 근무를 파트타임으로 바꾸었으나 회사일은 여전히 많았고,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고 나면 집안일에 쏟을 에너지가 남지 않았다.


먼저 가사도우미를 구해서 일을 맡겨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을 부리는 데 익숙한 편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도우미에게 덜컥 집 열쇠를 내줄 수도 없어, 도우미가 일할 때 집안에 함께 있으면서 돕는 것도 아니고, 편하게 쉬는 것도 아닌 채 어정쩡하게 집안을 돌아다녔다. 도우미의 일솜씨도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낼모레 일흔이지만 여전히 손이 빠르고 에너지가 넘치시는 친정엄마와 자꾸 비교되었다. 아무래도 내 살림 같이 하는 사람을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결국 몇 번 못 가 가사도우미는 포기했다.


그러고 나서는 철저하게 도구의 힘을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청소는 로봇청소기, 설거지는 식기세척기, 빨래는 세탁기와 건조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했다. 로봇청소기의 손이 닿지 않는 구석에 쌓여가는 먼지나, 식기세척기를 돌리고 나도 여전히 그릇에 붙어있는 밥풀떼기 등은 모른 척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요리는 쉽게 대체할 수 없었다. 피코크와 비비고의 온갖 레디메이드 음식을 이용하다가, 그게 질릴 때쯤 게르만 민족에서 배달도 곧잘 시켜먹었으나, 아이에게 허구한 날 가공식품에 배달음식만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도 엄마 손맛 같은 집밥이 그리웠다. 가끔씩 친정에서 반찬을 공수해오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드디어 반찬가게를 향하게 된 것이었다. 평소에는 위생이 신경 쓰여서 잘 쳐다보지도 않던, 동네 유일의 반찬가게를.


주욱 늘어져 있는 반찬들을 휘휘 둘러보았다. 어머, 저기 오이 볶음이 있네. 아삭아삭하고 짭조름한 식감 때문에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이었다. 오이를 절여서 갖은양념에 볶기만 하면 되는 쉬운 요리인 것 같아서 신혼 초에 몇 번 만들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잘 되지 않았다. 역시 한국 요리의 핵심인 '갖은양념'은 신혼 애송이가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반가운 마음에 한 팩 담았다.


그러고 나서 둘러봤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반찬이 없었다. 고민하다가 오징어볶음 한 팩을 골라 넣었다. 볶음요리는 어렵지 않지만 각종 채소를 사서 다듬고 썰어야 하는 게 귀찮지. 굴소스도 한 병 사면 절반의 절반도 못 먹고 유통기한이 지나서 버리기 일쑤고.


계산하려고 얼마인지 물으니 만 삼천 원이란다. 히익! 고작 두 가지 샀는데 만 삼천 원? 아주머니에게 오징어볶음의 가격을 물으니 한 팩에 만 원이란다. 얼마 들지도 않았는데. 이럴 거면 외식하는 게 더 싸겠다. 이사 오기 전 동네의 반찬가게는 반들반들 윤이 나게 깨끗한 가게 안에서 하얗고 봉긋한 모자를 쓴 아주머니가 침이 튀지 않도록 비닐 마스크를 고 서서는 콩나물무침을 한 팩에 천 원에 팔곤 했는데. 아이 학교를 위해 무리하게 학군지로 옮겼더니만 비싸진 건 학원비뿐만이 아니로구나.


집에 와서 반찬통을 열고 옮겨 담는데 뱃속이 꼬르륵거렸다. 점심을 먹지 못한 게 생각났다. 그래, 맛 좀 볼까? 만 원짜리 오징어볶음 통에서 어림짐작으로 천 원어치 정도 꺼내어 후라이팬에 달달 볶았다. 금방 따뜻한 기운이 올라왔다.



후라이팬째 식탁 위에 놓고 밥을 퍼서 앉았다. 커다란 오징어 조각 하나를 입에 넣고 씹자 이가 쑤욱~ 들어갈 정도로 부드럽다. 탱글탱글 씹히는 맛도 좋지만, 이런 식감도 나쁘지 않아. 양념 맛을 보니 적당히 달고 매운 것이 딱 알맞다. 맛있네. 쪼그라들어있던 마음이 조금씩 펴진다.


쿠팡 앱을 열어 생물 오징어 가격을 확인해 보았다. 요새 오징어가 비싸구나. 그래, 야채값도 비싸더라. 마치 반찬가게 아줌마의 대변인이라도 된 것처럼 자신에게 설득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아. 여기 정착하자구. 그럴까? 요리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들어. 배달음식도 지겹잖아. 그녀는 내면의 대화를 주고받으며 밥 한 공기를 순식간에 비워냈다.


며칠 뒤 그녀는 반찬가게 앞을 지나다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무슨 일이지?' 궁금해하며 집으로 돌아오다가 이웃집 할머니와 마주쳤다. 아이들 학원 셔틀을 태우느라 일주일에 몇 번씩 얼굴을 보는 사이었다. 할머니가 그녀에게 "소망이 엄마, 요 앞 반찬가게 가봤어? 거기 잘해. 오늘 대보름이라 나물이랑 오곡밥 세트 한정수량으로 팔던데 몇 개 안 남았을걸. 얼른 가 봐."하고 알려주셨다.


아하, 오늘 대보름이구나. 그건 딱히 관심 없다만, 거기 반찬가게 잘하는구나. 정착해도 되겠어. 아이 학원 세팅에 이어 가사 세팅을 마쳤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뿐했다.






* '신혼 애송이'란 표현은 개그맨 김재우 님의 인스타그램에서 빌려 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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