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이 Apr 03. 2021

패닉 바잉 (panic buying) - 1

"시중에 역대 최대 규모의 토지보상금이 풀린다던데. 집값 오르면 어쩌지?"     


식탁에 앉아 토스트를 입에 물고 스마트폰을 보던 남편이 말했다. 이수가 슬쩍 쳐다보니 얼굴빛이 어두웠다. 그는 애써 웃으며 "그래도 전세보증금 낼 돈은 충분하니까 괜찮겠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수는 그 말이 괜찮지 않았다. 부동산의 '부'자도 모르는 이수이지만, 세상 돌아가는 게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피부로 다가왔다.          




이수가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는 평생 하루도 쉬지 않고 성실히 가게를 꾸려 모은 돈으로 땅을 샀다. 90년대에도 이런 동네가 있나 싶을 만큼 낙후되었지만, 곧 있으면 개발된다는 소문이 무성한 곳이었다.     


토지등기부에 당신 이름 석 자를 올린 날, 소주 한 병에 거나하게 취해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는 이수와 동생을 앉혀놓고, "그동안 고생 많았다. 우리도 조금만 더 참으면 부자 된다."라고 말씀하셨다.     


자신이 딱히 고생이랄 것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부자 된다는 말에는 이수도 마음이 설레었다. 구립도서관을 오가는 길에 있던 고급 주택단지의 양옥집들이 떠올랐다. 이런 집에서는 누가 사나 궁금했는데. 나도 이제 붉은 벽돌집 이층 한 구석에 내 방을 가지고, 창문에는 하얀 레이스 커튼으로 장식할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부풀었다.     


곧 있으면 개발된다던 그 땅은 이수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갈 때까지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대기업의 체인점이었던 아버지의 가게가 갑의 물량공세와 불공정행위에 허덕이다가 지리멸렬한 법정공방으로 들어가자, 가세는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사춘기 여학생에게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었다. 학교 쉬는 시간에 매점에서 빵을 사 먹을 때에도, 야간 자율학습 전에 분식집에 가서 떡볶이를 주문할 때에도, 이수는 주머니 속의 돈을 백 원 단위까지 헤아리면서 친구들이 이수의 가난을 눈치챌까 봐 초조했다.     


이수는 이 모든 괴로움이 어쩐지 '분수에 넘치는 것을 욕심냈기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착실히 일해서 번 돈을 저축하는 신성한 근로의 삶이 아니라, 부동산이라는 불로소득으로 일거에 부자가 되려다가 벌을 받은 것이라고.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불로소득은 나쁜 거라고 배우기도 했는데.     


그때부터 부동산은, 재테크는 이수에게 금기가 되었다.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볼드모트와 같은 존재.



차에서 내리니 눈 앞에 짙은 녹음이 펼쳐졌다. 눈이 시원해지는 초록이었다. 청량한 공기가 코를 타고 폐 안 깊이 스며들었다.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도 99.9%의 공기. 매미들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힘차게 울어댔다.


숲 사이로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보였다. 놀이터에 있는 정글짐과 뺑뺑이가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셨다. 알록달록 선명한 페인트 색은 갓 칠한 듯했다. 두툼하고 푹신해 보이는 바닥은 친환경 자재이려나.  

 

"이 동네 완전 리조트 같다."

"그러게. 공기부터 달라.""

"준이 여기 있으면 비염 싹 낫겠는데."

"놀이터도 새 거야. 준이가 좋아하겠다."


이수는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한 오랜 지방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기 위해 남편과 함께 전셋집을 구하는 중이었다. 서울 도심으로 곧바로 들어가기는 부담스러워서,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이지만 실제로는 경기도나 다름없는 이 동네가 어떨까 싶었다.  


부동산에 들어가기 전에 동네를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풍성하게 우거진 가로수들을 따라 걷다 보니 산으로 연결된 산책로가 나왔다. 산책로를 지나쳐 가니 개천이었다.


"저거 백로 아니야?"

남편이 탄성을 질렀다. 우왓! 진짜네. 목이 길고 구부러진 하얀 새가 수면을 콕콕 쪼고 있었다. 물고기 사냥이라도 하는 듯했다. 요즘 세상에 서울에서 백로를 볼 수 있다니. 아이가 얼마나 좋아하겠어. 여기로 하자. 아파트도 신축이라 깔끔해 보여.


눈에 띄는 부동산에 들어가서 전세매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중개인은 입에 침을 튀겨가며 '숲세권' 동네의 장점을 설파했다.


마침 비어 있는 집이 있어서 보러 가는 길에 담벼락에 '여름에는 뱀 주의'라고 쓰여 있는 경고문을 보았다. 헉! 진짜 뱀을 마주치는 건 아니겠지. 내심 걱정하면서도, 얼마나 청정한 지역이면 저런 경고문이 가능한 것일까 감탄했다.


그다음 주말에 이어서 같은 단지의 몇 군데 매물을 둘러본 다음 이수는 계약을 했다. 자연친화적인 환경에서 아이를 살게 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지만, 내심 '이 정도가 내 분수에 맞다'는 생각도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다 아는 으리으리한 학군지, 역세권 아파트는 어쩐지 무리일 것 같았다.


분수에 맞지 않게 욕심내지 마. 마음속에서 계속 두려움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심심해. 놀아줘.”

“아까 놀이터 갔다 왔잖아.”

“아무도 없어서 못 놀았단 말이야. 또 가자.”

“지금은 사람 더 없을 걸? 하루 중에 햇볕이 제일 뜨거울 때거든.”

“그럼 칼싸움 하자.”

“그건 아침에 했는데?”

“그래도 또 해. 그래도 심심하단 말이야.”

“어휴.”

“그럼 옥토넛 틀어줘.”

“그것도 점심 먹고 나서 한 시간이나 봤잖아.... 그냥 칼싸움 하자.”     


처음에는 행복했다. 이수는 육아휴직을 하고 유치원 하원 후 매일같이 산으로, 개천으로, 텃밭으로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놀았다.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흙을 밟을 때면, 이수가 마치 헬렌 니어링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다.


이 좋은 걸 다른 엄마들은 왜 안 하는 거지? 다들 애 어릴 때부터 사교육에 열 올리지 말고 이렇게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살게 해 주면 좋으련만.     


그 생각은 유치원 첫 방학을 맞이하여 산산이 부서졌다. 국공립 유치원은 여름방학이 5주나 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말은 아침 8시에 일어나서 밤 10시나 되어야 자는 혈기왕성한 남자아이의 14시간을 온전히 엄마인 이수가 채워줘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5주 동안이나.


자연 속에서 뛰노는 것은 길게 잡아봐야 하루 세 시간이면 충분했고, 그마저도 한참 더운 여름날에는 오 분만 걸어도 몸이 물 먹은 솜처럼 축 늘어지기에 나갈 수도 없었다.  집에서 온 몸을 다해 놀아주는 것도 한두 시간이면 기진맥진했다.


육아전문가들은 아이를 심심하게 두어야 창의성이 개발된다고 입을 모아 말하던데, 가만히 두면 유튜브나 틀어달라고 조르는 건 우리 아이만 그런 걸까. 온종일 남아도는 시간에 아이를 스마트폰에서 떼어 놓으려면 종목이 뭐든 가리지 않고 어떤 학원이라도 보내야 했다.     


"네, 드림 영어학원입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6세 아이가 다닐 수 있는 방학특강이 있나요?"

"네. 오전에 하는 3주 과정 프로그램이 있어요. 원어민 선생님이 수업하시고요."

"셔틀 있나요?"

"어느 동네세요?"

"수미동이요."

"죄송하지만 거기까지는 셔틀이 안 가요."

"아이들을 여러 명 모아도 안 되나요?"

"한 열 명 이상 모으시면 가능한데, 그것도 장담하기는 어렵네요."


아이를 보낼 곳을 알아보다가 이수는 '숲세권'의 숨은 의미를 알게 되었다. 사방 둘러봐도 숲밖에 없다는 것. 역이 있었으면 역세권이었을 것이고, 편의시설이 많았으면 번화가라 불렸겠지.     


아파트만 덩그러니 지어지고 아직 인프라가 형성되지 않은 동네에는 학원은커녕 그 흔한 키즈카페 하나 없었다. 근처 동네 그 어떤 학원에 전화를 해 봐도 '거기까지는 셔틀이 가지 않는다'는 대답만 들었다.


학원은 포기하고 식사 준비에 쓰는 노력이나 아껴볼까 싶어 배달어플을 켜면 '배달 불가 지역'이라는 메시지가 뜨기 일쑤였다.     




“여보, 이 집 전세기간 끝나면 이사 가자.”

“왜? 어디로?”

“학원 보낼 수 있는 데가 하나도 없어. 너무 힘들어.”

“언제는 어릴 때 사교육 안 시킨다더니?”

“내가 잘못 생각했어. 방학하니까 죽겠네. 그나마 지금은 육아휴직이라도 하지, 내년에 복직하면 대책이 없어.”

“그래도 서울에서 여기만큼 공기 좋고 산 가까이 있는 곳도 별로 없는데. 진이 비염도 많이 좋아졌잖아.”

“비염이 문제가 아니야. 그리고 요새 아파트들은 조경이 워낙 잘 되어 있어서 숲 가까이 사는 거랑 별 차이 없더라.”

“하긴, 좀 있다가 초등학교 가니까 학원 너무 없는 동네에 계속 사는 것도 그렇긴 하네. 좀 알아보자.”     


온종일 애랑 엉켜서 삼시 세 끼를 해 먹는 방학을 보낸 후 이수는 무조건 전세기간 만료 후에는 학원이 밀집한 학군지로 이사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남들이 좋아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구나. 나만 그걸 몰랐네. 그동안 학군지 입성에 목을 매는 엄마들을 은근히 우습게 여긴 것도 머리 숙여 반성했다.     


그나마 육아휴직 중인 지금이야 내 몸 하나 힘든 것을 참으면 그만이지만, 복직한 후에는 도저히 대책이 서지 않았다. 집에서 도보로 이동 가능한 학원가에서 하루에 두세 개 정도는 뺑뺑이를 돌려야 공백 없이 아이를 돌볼 수가 있었다.


마침 그 무렵이면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이기도 했다. 이참에 한 군데 집을 사서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다음 이야기


https://brunch.co.kr/@mychoi103/88


https://brunch.co.kr/@mychoi103/89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