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뒤 금요일, 정식 계약서를 작성하는 날이었다. 매도인 측 부동산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양쪽 중개인들이 앞다투어 잘 샀다며, 앞으로 좋은 일만 있을 거라며 덕담을 해왔다. 이수는 괜스레 불안했다. 집도 못 보고 샀는데.
곧이어 부동산 안으로 갈색의 긴 생머리를 한 여자가 들어왔다. 아이보리색 마바지에 검정 여름 니트를 입고 어깨에는 고야드의 숄더백을 매고 있었는데, 딱 봐도 이수보다 어려 보였다.
여자는 중개인들과 이수를 번갈아 본 다음 이수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집주인이에요.”
엄청 세련된 여자네. 이수는 무릎 위에 하얀색 에코백을 올려놓고 의자에 앉아 있다가 저도 모르게 엉거주춤 일어나 “안녕하세요.”라고 말한 뒤 다시 앉으면서 에코백이 눈에 띄지 않도록 옆 의자 위로 슬쩍 치웠다.
“원래 이 동네 사시는 분이신가요?”
“아니에요. 처음 왔어요.”
“혹시 아이가 있으세요?”
“네. 내년에 초등학교 들어가요.”
“애 학교 보내려고 이리로 이사 오시는구나! 잘 오셨어요. 이 동네 애 키우기 엄청 좋아요. 학원도 다 가깝고, 편의시설도 잘 되어있고, 괜히 학군지가 아니더라구요. 엄마들이 좀 극성이긴 하지만 중심만 잘 잡으면 이런 곳도 없어요.”
그래? 역시 잘한 선택인 걸까?
“저희 집도 좋아요. 단지가 큰 건 아니지만 이 근처 같은 평수의 다른 아파트들보다 구조가 잘 빠졌어요. 저는 요 앞에 B 아파트로 이사 갔는데 거기보다 나은 거 같기도 해요.”
그녀가 말한 B 아파트는 부동산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곳이었다. 설마 이수네가 오직 학군지 입성을 위해 영혼까지 끌어모아 산, 그 동네에서 제일 싼 매물인 A 아파트보다 낫겠어. 이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남편이 공직자만 아니었어도 그냥 이주택자로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쉬워요. 처음 산 집이라 애정이 많거든요.”
매도인은 시종일관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살짝 격앙된 하이톤으로 묻지도 않은 얘기를 떠들어댔다. 왜 저렇게 신이 난 걸까. 이수는 한층 더 불안해졌다.
계약서를 쓰면서 건물등기부를 확인해보다가 그 이유를 알았다. 매도인은 삼 년쯤 전에 칠억 오천만 원에 아파트를 샀고, 거진 그때의 두 배 값을 받고 이수에게 매도한 것이었다.
어린 친구가 발 빠르네. 이수는 씁쓸했지만 매도인의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얘기를 듣고 이해가 되었다. 그래, 당신도 애 학교 보내려고 그때 집을 산 모양이구나. 대한민국 초등학생 부모로 사느라 고생 많네요, 우리 둘 다. 나도 애를 좀 일찍 낳았으면 그때 샀을 텐데 아쉽구만.
계약서를 다 쓰고, 일억 원이 넘는 나머지 계약금을 치르고 나서야 처음으로 집을 볼 수 있었다. 임차인은 이미 가계약금이 오간 사실을 알고는 버티기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이 출근하고 가사도우미가 있는 금요일 오전에만 집 보는 것을 허락했기에 그 시간에 맞추어 계약날을 잡은 것이었다.
오 마이 갓! 이수가 도면만 보고 상상했던 것과는 구조가 영 달랐다. 좁고 어수선했다. 거실 한쪽 벽면을 꽉 채운 책장에는 온갖 책들이며 유인물들이 너절하게 꽂혀 있었고, 전선이 뒤엉켜 있는 컴퓨터가 거실까지 나와 있었다. 안방 구석에 있는 수납장에서는 어쩐지 퀴퀴한 곰팡네도 나는 것 같았다.
“어머, 집이 왜 이렇게 되었지? 제가 전에 와서 봤을 때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임차인이 집을 함부로 써서 그런 모양이에요. 짐이 빠지면 지금보다 훨씬 넓어질 거예요, 사모님.”
매도인 측 중개사가 당황해서 열심히 변명해댔지만, 이수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뭐야, 나 혹시 속은 거야? 매수인 세 명 붙어있었다는 것도 거짓말 아니야?
너무 비싸다고 만류하던 남편의 말이 생각났다. 남편이 이 집을 보면 뭐라고 할까.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매도인의 신 난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두 달 뒤, 잔금일의 부동산 사무실. 이번에는 이수가 웃고 있었다. 부동산 초짜의 추격매수라는 승부가 적중했다. 두 달 사이 일 억원이 더 뛰었다. 앞으로도 얼마가 더 오를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품처럼 부풀어 오르는 시장 가격이 불안했지만 어쨌든 이제 이사 걱정 안 하고 발 뻗고 누울 내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가만히 있으려 해도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매도인은 계약 날 보았던 해사한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시종일관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괜히 팔았다고 후회하는 건가. 거진 두 배값을 받았으면 됐지 뭘 그렇게 욕심을 부리고 그래.
잔금을 치르고 헤어진 다음 이수가 서류에 도장 하나를 빠트려서 다시 매도인 측 중개인에게 연락했을 때, 중개인은 조심스럽게 "혹시 또 빠트린 게 있는지 다시 한번 잘 체크해 보세요. 매도인이 '이런 일로 또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하시네요."라고 말했다. 쌀쌀맞기는. 하지만 이젠 상관없었다.
건물등기부에 이수와 남편의 이름이 나란히 오른 것을 확인한 날, 이수는 못 마시는 술도 한 잔 했다. 단골 식당에서 추어탕을 먹다가 갑자기 남편이 "반주 한 잔 할까?" 하더니 맥주를 한 병 시켰다. 둘 다 술이 약해서 소주는 엄두도 못 내는 터라, 추어탕에 맥주라는 애매한 조합으로 건배를 하게 되었다.
차가운 유리컵에 콸콸 맥주를 붓자 거품이 컵 가장자리에서 아슬아슬하게 흘러넘칠 듯 남실거렸다. 짠~ 하고 잔을 부딪친 후 단숨에 반 컵을 들이켠 남편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 친구들이 부모 도움 한 푼 안 받고 자기 힘으로 서울 시내 학군지에 집 산 애는 너밖에 없다고, 축하한다네."
어이, 이봐. 집은 내가 샀거든. 나도 같이 벌거든. 뭘 혼자 다 한 것처럼 감상에 젖어 있어. 지적하려다가 남편의 감격에 찬 얼굴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우린 맞벌이지만 당신은 언제나 가정경제의 최종 책임을 지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시달리며 무거운 어깨를 하고 있더라. 오늘만큼은 어깨를 펴고 지금 이 순간을 실컷 즐기라구.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났다. 소주 한 병을 마시고, 똑같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이수와 동생을 앉혀 놓고 이야기하시던 아버지. 그 땅은 이수가 결혼을 하고, 애를 낳고, 이수 명의로 된 집을 살 때까지도 개발이 되지 않았다.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이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몇 달 뒤 임차인이 나가고 나서 집을 인도받았다. 중개인의 말 그대로 짐이 빠지고 나니 구조도 괜찮고 생각보다 넓었다. 다행이었다.
무엇보다 그냥, 집을 산 것 자체가 다행인 시국이었다. 잔금을 치르고 집을 인도받는 몇 달 사이, 이번에는 전세시장이 출렁였다. 이수의 예상대로였다. 아니 사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집값이 오르는데 전셋값이 버틸 재간이 있나.
인테리어 공사에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처음 집을 살 때에는 일단 아이 초등학교만 잘 보내고, 그다음에는 더 큰 평수의 아파트로 이사를 갈 생각이었기에 간단히 도배와 장판만 새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취득세 고지서에서 깜짝 놀랄만한 숫자를 보고는 갈아타기 쉽지 않겠다는 예상이 들었다. 부동산 중개수수료도 예상보다 훨씬 비쌌다. 둘을 합하면 이수의 연봉보다 높은 금액이었다.
이 집에서 얼마나 오래 살게 될지 알 수 없어. 어쩌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집이 될지도 몰라. 이수는 최대한 예쁘게 꾸미기로 마음먹고, 주말마다 남편과 인테리어 전시장이며 가구거리를 돌았다. 빌트인 가구를 설치하는 것도, 벽에 못을 박는 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발이 아픈 줄도 모르고 돌아다녔다.
공사를 다 마치고 이사를 들어온 다음 날, 이수는 휴가를 냈다. 출근하는 남편과 학교 가는 아이를 배웅한 다음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사들고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거실 창을 마주 보고 마룻바닥에 앉았다. 새로 주문한 식탁도 소파도아직 들어오지 않아 다소 휑했지만, 창문 밖으로 연초록 나뭇가지들이 한들한들 흔들리는 풍경이 평화로웠다. 비록 햇빛은 거실 바닥의 1/3 정도밖에 차지 않았지만 헤링본 원목마루와 어우러지며 예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일회용 컵의 뚜껑을 열자 고소한 커피 향이 집 안에 퍼져나갔다. 이수는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고요한 집안 공기를 느껴보았다. 마치 노아의 방주에 마지막으로 올라탄 당나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창문 밖은 점점 물이 차오르고 있구나. 저 물은 어디까지 찼다가 흘러갈까. 안도와 불안감이 동시에 몰려왔다. 이수의 가족은 방주에 탔지만, 동생네 가족은 아직 저 창 너머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