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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Apr 08. 2021

15분 - 1

오후 한 시 사십칠 분.

키즈카페 벽에 걸려있는 시계를 보고 윤희는 한숨을 쉬었다. 지유 엄마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한 시. 언제나 약속시간보다 이삼십 분은 예사로 늦는 지유 엄마이기에 이번에도 꽤 기다리게 될 거라고 미리 예상하긴 했지만 거진 오십 분을 기다려 본 건 처음이었다.     


"엄마, 지유 언제 와?"

아이는 오 분마다 한 번씩 윤희에게 보챘다. 심심해, 놀아줘.

별 수 없이 윤희는 키즈카페에 입장하자마자 여태 엉덩이 한 번 의자에 못 붙이고 계속 아이를 상대하고 있던 중이었다.      


보호자 입장료 대신에 주문했던 따뜻한 카페 라떼는 한 모금밖에 마시지 못한 채 테이블 위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아이를 친구인 지유와 함께 놀게 하고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셔보려던 윤희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럴 거면 집에 있는 게 나았겠다. 윤희는 속으로 푸념을 하면서 아이와 블럭을 쌓기 시작했다.          




작년 늦가을, 윤희는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 위해 추첨 전쟁을 치렀다. 윤희가 이사 예정인 동네에서 보낼 수 있는 유치원은 총 여섯 곳. 모두 어마무시한 경쟁률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출산율 저하로 곧 인구절벽이 곧 도래한다고, 일자리가 없어서 실업율이 역대 최고라고 뉴스에서는 심심치 않게 떠들어 대는데 도대체 유치원 경쟁율은 왜 그렇게 센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치원을 많이 만들면 출산율도, 일자리도 늘어나는 거 아닌가, 왜 이 쉬운 방법을 놔두고 행정가들은 골머리를 썩히고 있는가, 소박한 의문을 품기도 했다.     


어쨌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려면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여섯 군데 중 세 군데는 '처음학교로'에서 온라인 추첨이 가능했지만, 나머지 세 군데는 추첨날 현장에 가서 뽑기를 하는 시스템이었다.


윤희는 회사의 눈치를 보며 세 번의 연가를 내고 현장추첨에 참석했지만 모두 떨어졌다. 심지어 윤희는 크리스천인데도 절에서 운영하는 불교유치원까지 지원했는데, 일단 당첨이 된 다음 보낼지 말지 고민할 요량이었으나 보기좋게 낙방했다.


윤희의 앞뒤 번호에 해당하는 엄마들이 당첨을 의미하는 빨간 공을 뽑아들고 환호할 때, 윤희는 홀로 하얀 공을 손에 쥐고 허탈해했다. 부직포로 만든 공이 손바닥 안에서 까끌거렸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벌주신 건 아니겠지. 아니야, 하나님도 유치원 경쟁이 얼마나 치열한지 아실 테니 용서해 주시겠지. 이제 남은 건 온라인 첨뿐이었다.


온라인 추첨 날, 윤희는 마치 입시결과발표를 앞둔 사람처럼 하루종일 심장이 두근거렸다. 발표시간 십 분 전부터 슬쩍 사무실 컴퓨터로 '처음학교로'에 접속해서 틈틈히 새로고침을 누르고 있자니 어느 순간 화면이 바뀌었다. 두 군데는 떨어졌지만 한 군데 당첨! 게다가 당첨된 곳은 학비가 전액 무료인 국공립 유치원이었다.     

세상에, 우리 아이가 효자로구나! 윤희는 저도 모르게 회사 복도에서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다. 국공립 유치원 들어간 것도 이렇게 기쁜데 아이가 명문대에 합격하기라도 하면 얼마나 행복할지, 윤희의 머릿속은 한참 까마득한 미래까지 신 나게 내달렸다.      



"유치원 가기 싫어."     

아이는 오늘 아침에도 눈 뜨자마자 보채기 시작했다.      

"왜 가기 싫은데, 응?"     

"선생님 무서워. 막 혼내."     

"그래도 친구들이 있잖아."     

"아무도 나랑 안 놀아준단 말이야. 으앙!"        

결국은 눈물을 터트리며 서럽게 울었다.        


당첨의 기쁨은 오래 가지 않았다. 셔틀버스가 없는 유치원이라 걸어서 등, 하원이 가능한 곳으로 집을 구하기까지 했건만, 아이는 유치원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매일 아침 가기 싫다고 눈물바람이었다. 전에 다니던 가정식 어린이집보다 사람도 많고, 규율도 세져서 낯선 듯 했다. 어쩌면 좋아. 매일 아침 윤희도 아이와 함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같은 반에 친한 친구라도 생기면 나아지지 않을까 하고 기다려 보았으나 다섯 살 초반 아이의 인간관계는 미묘한 것이었다. 분명 친구에게 관심이 있고 함께 놀고 싶어했으나, 제 힘으로 사귀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아이는 늘 등, 하원길에 윤희의 옷자락을 붙들고 같은 반 친구를 가리키며 물었다.

"엄마, 쟤는 어디 살아?"

"엄마, 쟤는 몇 살이야? (너랑 동갑이야, 임마.)"          


어떤 날은 하원하고 나오는 길에 같이 걸어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말했다.

"엄마, 쟤네는 왜 같이 가? 같은 집에 살아?"

쳐다보는 눈빛이 못내 부러워보였다.     


유치원 친구는 스스로 사귀는 게 아니라 엄마가 만들어 주는 건가. 고민에 휩싸여 윤희는 고등학교 절친들의 단톡방에 물었다. 윤희가 결혼이 제일 늦었기에 다들 선배맘들이었다.     

"얘들아, 유치원 친구는 엄마가 만들어 주는 거야? 애가 영 친구를 못 사귀고 겉도네."


곧이어 카톡이 쏟아졌다.

"야, 너도 드디어 그 세계에 입성했구나!"

"어휴, 말도 마라. 나 그 때 생각하면 눈물 난다. 진짜 별의 별 거 다 해봤어. 오죽하면 애 데리고 상담실까지 갔겠니."

활발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그냥 뒀어. 내 친구도 못 사귀는데 도저히 모르는 엄마들한테 말 붙일 용기가 안 나더라고. 근데 엄청 고민되긴 하더라."

얌전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동네 엄마들 엄청 따라다니긴 했는데 진짜 지긋지긋했어. 나중에 애 초등학교 고학년 되고 나서는 그 무리들 연락 싹 끊었잖아."

활발한 듯 하지만 사실은 얌전한 친구도 거들었다.     


친구들이 앞다투어 쏟아내는 위로와 조언을 경청한 끝에 윤희는 유용해 보이는 팁을 하나 건졌다.

"'같은 반 친구 중에 성격이 맞을 만한 아이 한 명만 집에 초대해. 집에 왔다가면 서로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한 번에 여러 명 초대하면 안 친해져."     


오케이. 한 명을 공략하라는 거지? 그런데 누구를?     

안타깝게도 윤희와 아이 모두 이 동네의 신입생이었다. 신생 아파트 단지들로 이루어진 이곳은 이미 몇 년 전에 동시에 입주해서 오랫동안 친분을 다진 엄마들이 많았다.     


아이 하원을 위해 유치원 앞에서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릴 때면 기분 탓인지 윤희 빼고 다른 엄마들은 모두 친한 것 같았다. 회사에서는 비교적 사교적인 윤희였지만, 이미 친한 엄마들 사이에 끼어들려니 생각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아이 친구를 만들어주려면 먼저 엄마들이랑 친해져야 하는데...         




그 무렵 윤희 앞에 구세주처럼 나타난 것이 지유 엄마였다.


지유 엄마는 유치원 하원을 대기하는 엄마들의 무리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녀는 언제나 물이 적당히 빠진 청바지에 흰색 캔버스 운동화를 신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씨컬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나타났고, 그녀를 보자마자 사람들은 여기 저기서 말을 걸었다.


"지유 엄마, 이따 부녀회 모임 올 거지?"

"지유 엄마, 지난 번에 알려 준 반찬 배달 사이트 괜찮더라."

"지유 엄마, 이따 지유 데리고 놀이터 나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온갖 질문과 제안들에 그녀는 늘 반달 눈웃음을 지으며 "네."라고 대답했다. 경쾌한 차림으로, 어디든 바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우와, 완전 핵인싸네. 동네 터줏대감 아니면 마당발 정도 되겠어. 엄마가 저 정도면 지유는 친구 걱정 안 해도 되겠다. 윤희는 사방에서 지유 엄마를 찾는 목소리에 파묻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있으면서 남몰래 지유 엄마를 부러워했다.


제 엄마를 닮았는지 아들 지유도 유치원 햇님반의 리더 격이었다. 언제나 활짝 웃는 얼굴로 햇님반 하원줄 맨 앞에 선 지유를 볼 때마다 윤희는 '우리 아이도 저렇게 유치원 생활을 즐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가슴 한 켠이 욱신거렸다.     


그런 지유 엄마가 학부모 총회에서 우연히 윤희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윤희는 회사에서 갈고 닦은 영업 실력으로 지유 엄마를 울고 웃긴 끝에 번호를 따고, '언니'라는 호칭과 함께 언제 차 한 잔 하자는 약속을 받아냈다. 앗싸! 남은 것은 적당한 때를 보아 커피 한 잔 하자고 청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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