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밍이 Apr 08. 2021

15분 - 2

https://brunch.co.kr/@mychoi103/83



그 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언니, 지금 뭐해요? 시간 되면 애들 하원 전에 커피 한 잔 할래요?"     

카톡 알림음을 듣고 휴대폰을 확인해 보니 지유 엄마였다.


윤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식탁 의자 위에서 한 쪽 양반 다리를 하고 앉아 아침에 아이가 먹다 남긴 미역국에 밥을 말던 중이었지만 "응, 좋아."라고 답장을 보낸 뒤 밥숟가락을 내려 놓고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스타벅스의 묵직한 출입문 손잡이를 밀고 들어가자 카운터 앞에 이미 지유 엄마가 와 있었다. 윤희는 커피값을 두고, 먼저 보자는 사람이 사는 '제안자 법칙'과 나이 많은 사람이 사는 '연장자 법칙' 중에서 잠깐 갈등했다. 그깟 커피 열 잔도 더 살 수 있지만, 맘 속으로 지유 엄마한테 목매고 있는 자신의 입장을 들키고 싶지는 않아서 신경쓰였다.       


아니야. 엄마들 사이의 황금률인 '더치페이'를 적용해야 되는 거 아닐까? 그게 모든 법칙에 우선하는 것 같던데. 윤희는 지난 번 학부모 총회 때 일을 기억해냈다.


아침 10시부터 교장선생님의 유치원 소개와 각 반 담임선생님의 인삿말, 학부모 교육까지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스케줄이 끝나고 나니 점심시간이었다. 반대표로 뽑힌 엄마가 "혹시 시간 되시는 분들은 같이 점심 드시고 가실래요?"라고 말했고, 십여 명의 엄마들이 우르르 몰려가 동네 식당의 긴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고기를 주로 팔지만 낮에는 간단한 식사를 겸하는 곳이었다.


회사에서도 행사 때마다 총무 역할을 도맡곤 하는 윤희는 엄마들과 수다를 떨고 밥을 먹으면서도 틈틈이 '식사비는 어떻게 걷어야 되는 건가? 사람이 많아서 반대표 엄마가 쏘기엔 액수가 큰 것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내가 여기 총무도 아닌데. 반대표 엄마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생각을 했다.


한바탕 수다가 끝난 다음 자리를 파할 때 윤희는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엄마들이 식당 카운터에 긴 줄로 서서 한 명씩 자신이 먹은 메뉴를 말하면서 계산을 하기 시작했다.

"갈비탕이요."

"만 이천 원입니다."

한 엄마가 카드를 꺼냈다.


"전 차돌된장이요."

"팔천 원입니다."

"현금영수증 해 주세요."

다른 엄마가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며 말했다. 식당 직원은 이 동네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라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한 명씩 차례대로 계산을 마쳐 주었다.


와우! 이렇게 놀랍도록 합리적인 세계라니. 눈치를 보다가 직급이 높은 사람이, 나이가 많은 사람이, 먼저 먹자고 한 사람이 쏘는 것도 아니고, 총무가 총대 매고 수금하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아름답구나. 이 엄청난 황금률을 시급하게 회사에 도입해야 해.


윤희는 감탄하다가 자신의 차례에 "육회비빔밥이요."라고 말하는 것을 까먹고 어버버거리는 바람에 단말기 포스에서 눈을 뗀 직원의 얼굴을 보고 겸연쩍게 웃었더랬지. 그런데 그 규칙이 두 명 사이에도 통용되는지 모르겠네.     


윤희가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지유 엄마는 어느 틈에 카드를 꺼내 들고 "언니, 뭐 마실래요?"라고 묻더니 바로 카운터에 있는 점원을 향해 "일단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하고요." 라고 말했다.    

 

어라? 얼결에 윤희도 "같은 걸로 주세요."라고 대답해버렸다. 아이, 나 아메리카노 써서 잘 못 마시는데. 얼음 녹여가면서 천천히 마시면 되겠지. 어차피 아이스 음료는 빨대로 몇 번 빨면 없어지더라.


평일 낮의 카페는 한산했다. 둘은 푹신한 소파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지유 엄마는 퍽이나 소탈한 성격인지 이제 겨우 두번째 보는 윤희에게 남편이며 시가, 아이들 얘기를 가감없이 오픈했고, 윤희는 열심히 맞장구를 치며 들어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수다를 떨고 나서 같이 유치원 하원길에 나설 때는 꽤나 친해졌구나 싶어, 윤희는 개선장군 못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옆에서 팔짱을 낀 지유 엄마가 그렇게 든든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날부터 윤희는 지유 엄마와 하원을 같이 했다. 서로 사는 단지가 달랐지만 그게 대수랴. 윤희는 그 쪽으로 갈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아이와 함께 지유네 단지로 넘어가 놀이터에서 함께 놀았다.


그런 일상이 한동안 반복되고 나자 어느덧 아이와 지유는 하원 친구가 되었고, 더 이상 다른 아이들을 부러워하는 일도 없게 되었다.          



처음에는 15분이었다.     


어느 날, 하원길에 지유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지유의 동생 지아가 열이 펄펄 끓어서 좀전에 병원에 데리고 왔다고, 지금 약국에서 약 타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15분 정도 뒤에나 유치원에 도착할 것 같으니 선생님께 대신 말씀 좀 드려달라고.     


목소리가 다급했다. 나는 애 하나도 힘든데, 둘을 키우면서 아이가 아프기까지 하면 얼마나 힘들까. 윤희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말했다.     

"걱정 마. 내가 지유 데리고 있을게. 늘 가던 놀이터에서 놀고 있을 테니 천천히 와."     


어차피 하원 후 매일 같이 놀이터 행이고, 아이와 지유는 알아서 잘 놀 테니 힘들 것도 없었다. 다만 남의 자식 데리고 있다가 안전사고 나면 큰 일이지 싶어, 윤희는 아이 둘을 이끌고 조심스럽게 횡단보도 두 개를 건넌 다음 놀이터에 도착해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아이와 지유가 그네 타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니 지유 엄마가 말 그대로 15분 뒤 지아를 데리고 허겁지겁 놀이터로 와서는 연신 고맙다며 윤희의 손에 따뜻한 커피캔을 쥐어 주었다.


봄바람이 생각보다 쌀쌀한 탓에 놀이터의 차가운 벤치의자에 앉아 으스스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고 있던 윤희는 얼른 탁! 캔뚜껑을 열고 따뜻한 커피를 생명수처럼 들이킨 뒤 지유 엄마를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나서 삼 주쯤 뒤였다.

하원 때 유치원 정문에서 만난 지유 엄마가 말했다.

"언니, 오늘은 같이 못 놀겠어요. 부녀회 모임이 있어서 지유 데리고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은 아이와 지유는 "싫어, 싫어. 같이 놀 거야."하면서 떼를 쓰기 시작했다.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같이 하원 후 놀이터로 직행했던 아이들이 그냥 헤어질 리 없었다. 윤희의 아이는 여전히 유치원을 싫어했지만 하원 후에 지유와 놀 수 있다는 기대로 참고 다니는 중이었다.


윤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별 수 없이 말했다.

"모임 언제 끝나? 그 때까지 내가 지유 데리고 있을게."


황토색 먼지바람이 시야를 가리고, 목 안까지 매캐해질 정도로 미세먼지가 심한 날이었다. 놀이터에서 노는 것은 포기하고, 윤희는 아이와 지유를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하필 그 날따라 엘리베이터도 고장이었다. 집이 있는 12층까지 헉헉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더니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이는 갑자기 친구를 집에 초대하게 된 상황에 신이 났는지 힘든 기색도 없이 지유와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이구, 내 새끼. 그 모습을 본 윤희는 피곤이 싹 가셨다. 한 시간 뒤 지유 엄마는 롤케이크를 사들고 윤희 집으로 와서 고맙다는 말을 남긴 채 지유를 데리고 갔다.     


그 때부터 종종 지유 엄마는 하원 시간에 일이 생겼고, 그 때마다 지유는 윤희가 맡게 되었다. 한 시간이 두 시간이 되는 것은 금방이었고, 어쩔 땐 한 나절이 되는 일도 있었다.     


윤희는 점점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차피 애 한 명 보는 거나 두 명 보는 거나 마찬가지야. 아이가 지유랑 노는 걸 좋아하잖아. 그렇게 자신에게 되뇌었으나 저어기 마음 속 밑바닥에서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https://brunch.co.kr/@mychoi103/85

https://brunch.co.kr/@mychoi103/86


이전 04화 15분 -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