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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Apr 08. 2021

15분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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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유 엄마가 카운터에서 계산을 치르고 윤희 쪽으로 왔다. 곧이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지유 엄마가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쭈욱 빨더니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언니, 미안해요. 많이 기다렸죠? 거의 시간 맞춰 왔는데, 지유가 밥을 안 먹어서 요 아래 분식집에서 김밥 먹이고 왔어요."     


그럴 거면 밥 먹는 중간에 연락을 하던가, 여기 키즈 카페는 음식물 반입도 되는데 사 가지고 와서 먹여도 되잖아. 대거리를 할 말이 하나 가득이었지만 참았다.     


"몇 시간 끊었어?"

"두 시간이요."

그래. 나도 두 시간 끊었는데 그 중 한 시간이 이미 지나버렸네. 이제서야 친구를 만난 아이가 한 시간 뒤에 순순히 집에 갈 리 없으니 나는 지금부터 여기에서 꼼짝없이 두 시간을 더 있어야 하는구나. 그것도 꼴보기 싫은 사람을 바로 면전에 두고.     


간만에 만났지만 지유 엄마도 그간의 서먹함을 의식한 듯 그 뒤로 말이 별로 없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윤희를 만나는 게 껄끄러웠지만 지유의 성화에 못 이겨 연락한 것 같았다.     


계속 서로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은 고역일 것 같아서 윤희가 먼저 제안했다.

"우리 교대로 장보고 올까? 시간도 절약할 겸."     


윤희의 동네에는 변변한 반찬가게도, 키즈 카페도 하나 없어서 윤희와 지유 엄마는 종종 아이들을 데리고 옆 동네인 이 곳으로 원정을 오곤 했다. 그럴 때면 아이들을 실컷 놀리고,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린 뒤 키즈카페 옆 건물에 있는 반찬가게와 슈퍼마켓을 들렀다 오는 것이 일과였다.     


"그럴까요?"

반색을 하며 지유 엄마가 말했다. 그래, 너도 나랑 같이 있는 게 불편하겠지. 그렇다고 뭐 그렇게 반색할 것까지야.     


말을 꺼낸 윤희가 호기롭게 지유 엄마더러 먼저 다녀오라고 했다. 예의상 "아니에요. 언니 먼저 다녀와요."라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건만, 지유 엄마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한 손에 지갑을 쥐고 일어나 나갔다. 기분 탓인지 지유 엄마가 경쾌하게 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지유 엄마가 가 버리고 나자 윤희도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 식어버린 카페 라떼 잔을 만지작거리며, 주인한테 얼음을 좀 달라고 해서 아이스로 만들어 먹을까, 그러면 주인이 싫어하려나, 멍하니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하아.. 지유 엄마가 나간 지 한 시간 반이 지나고 있었다. 지유 엄마는 두 시간 입장권을 끊었고, 각자 교대로 장을 보려면 한 시간 안에 들어와야 했는데, 지유 엄마가 지금 막 들어온다 해도 윤희가 장을 볼 시간은 삼십 분도 안 남았다.     


'교대로'라는 말의 뜻을 모르는 건가. 예전처럼 제 볼 일 보는 동안 내가 아이를 봐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게 누구를 호구로 아나! 마음 속으로 외치다가, 여름 방학 전에도 그와 똑같은 말을 마음 속으로만 외쳤던 것이 기억났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으앙!"

그 때 멀리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신기하기도 하지. 아무리 멀리 있어도 내 아이의 울음소리는 금방 구별할 수 있으니.     


바로 달려갔다.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지유는 그 옆에서 블럭을 한 손에 들고 멀뚱히 서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지유가 내 블럭 빼앗았어. 으앙!"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다. 활발하지만 다소 거칠고, 친구들을 리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지유와 얌전하고 차분한 윤희의 아이는 원래 성격이 잘 맞는 편이 아니었다. 지유는 종종 아이의 장난감을 빼앗거나 놀다가 흥분해서 아이를 밀쳤고,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그럴 때마다 윤희는 난감했다. 지유 엄마가 옆에 있으면 각자의 아이를 말리거나 달래면 그만이었지만, 윤희가 혼자서 아이 둘을 보고 있을 때에는 제 엄마도 없는 지유를 함부로 혼내기는 어려웠다. 혹시나 다그치는 것으로 들릴까봐 걱정이 되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지유한테는 묻지도 못했다.     


그저 아이에게

"친구랑 놀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지유가 많이 가지고 놀고 싶었나봐. 일단 양보해 주는 게 어떨까?"

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런 날 밤이면 아이는 잠자리에서

"엄마는 지유가 좋아, 내가 좋아?"

라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아이가 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것을 묻는지 윤희는 영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 순간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윤희는 여태까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 남의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치 둥지로 들어온 뻐꾸기의 알을 자기 알인 줄 알고 키우는 오목눈이처럼, 뻐꾸기가 자기 새끼 해치는 줄도 모르고.


더 이상 새대가리 짓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지유야, 친구 거 빼앗으면 안 돼. 돌려줘."

지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얼굴로 윤희를 보았다. 윤희는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한 번 더 말했다.

"지유야, 친구 거 빼앗는 거 나쁜 짓이야. 어서 돌려줘."

지유가 마지못해 블럭을 아이에게 주었다. 블럭을 받아드는 아이의 얼굴이 헤실 풀렸다.     


그 때 마침 지유 엄마가 들어왔다. 허겁지겁 서두는 모양새도 아니었다. 언뜻 보니 손에 보세 옷가게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이것이 반찬 사러 다녀오랬더니 옷쇼핑을 하고 왔네. 오만 정이 떨어졌다. 이제는 진짜 안녕이다.    

 

아이를 일으킨 다음 말했다.

"지유 엄마, 우리는 이만 갈게."     

지유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이제 보니 지유가 제 엄마랑 표정도 빼다 박았구나.


"언니, 아직 삼십 분 남지 않았어요?"

"우리는 한 시에 맞춰서 왔으니까 두 시간 훨씬 지났지. 이만 가볼게."

"언니 장 보러 안 가요?"

"지유 엄마 삼십 분 뒤에 갈 거 아니야? 그 안에 내가 장을 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은데."     


테이블 위에 놓인 일회용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숄더백을 어깨에 맨 뒤 과한 냉방에 대비하기 위해 가져 온 가디건을 주워들어 숄더백 위에 느슨하게 걸쳤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지유가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거리에 멀찍히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슬쩍 고개를 들어 지유 엄마를 쳐다보며 무심한 듯 말했다.

"근데 지유가 자꾸 친구 물건을 빼앗고 애들 밀치고 그러더라. 조심 좀 시켜야 될 것 같아."     


뒤도 안 돌아보고 나오는 길이 후련했다. 동네 마당발인 지유 엄마가 이 사람 저 사람을 붙들고 윤희 욕을 해대는 광경이며, 2학기 때 하원 줄 앞에서 엄마들이 윤희 뒤에서 수군거리는 광경이 상상되었지만 어쨌거나 이제는 상관 없었다.


아이야, 친구 없으면 어때. 엄마가 확실하게 네 편이 되어 줄게. 남은 방학은 우리 둘이 오손도손 잘 지내보자.     

   



다행히 윤희가 상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부쩍 큰 아이는 2학기 때 같은 반에서 제 힘으로 친구를 만들었다. 윤희의 아이처럼 성정이 차분하고 조용한 친구였다.     


그 친구의 엄마에게 초대를 받아 놀러간 날, 두 아이가 조용히 마주앉아 편안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더 없이 흐뭇하며 가슴 한 편이 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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