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때에는 주말에도 빠짐없이 붙어 다니던 단짝이었는데, 대학생이 되어서도, 직장에 들어가서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만나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서로 나누는 사이였는데.
차현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서서히 연락이 뜸해지다가 결국 이렇게 오랜만에 전화해서 결혼 소식이나 주고받는 사이가 되다니. 세월이 무상하기도 하고, 그게 다 제 탓인 것만 같아서 차현의 마음속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친구는 청첩장도 줄 겸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자며 서촌에서 만나잔다.
"서촌? 거기 뭐가 있는데?"
"얘가 감 떨어졌네. 요새 거기가 핫플이잖아. 내가 잘 아는 레스토랑 있어. 거기로 와."
그렇구나. 결혼 전에는 친구와 둘이서 이태원이니 대학로니 온갖 맛집을 찾아다녔는데. 어느새 나도 생활에 찌든 아줌마가 되었군요.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오랜만에 핫플 나들이를 할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약속 당일, 차현은 두 시간 전부터 옷장을 뒤졌다. 결혼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걸 텐데 같이 셀카 백 장 찍자고, 꼭 예쁘게 차려입고 나오라며 친구가 신신당부하기도 하기도 했지만, 차현도 오랜만에 좀 꾸며보고 싶었다.
눈으로 옷장을 훑다가 모조에스핀의 진청색 H라인 스커트가 눈에 들어왔다. 솔로 시절 소개팅 갈 때 자주 입던 '작업복'이었다. 허리둘레에 벨트처럼 늘어진 굵은 리본이 멋스러워서 흰 블라우스에 받쳐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청담동 며느리' 같다고 했지. 물론 옛날 얘기지만. 입어봤는데 간신히 허벅지 두 짝을 욱여넣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퍼가 올라가지 않았다. 아아, 이건 포기.
다음에는 그레이 색 원피스가 보였다. 보세 가게에서 산 거지만 고급스러운 모직 원단을 사용해서 꽤 비싼 값을 치른 물건이었다. 디자인도 독특했다. 저건 결혼하고 나서 산 거니까 맞겠지. 입어보니 지퍼는 간신히 올라갔지만 엉덩이 부분이 꽉 조여서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되었다. 아차, 애 낳기 전에 산 거구나. 휴휴, 이것도 포기.
결혼 전에 샀던 스키니 진들은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옷장 속을 뒤적거리다 결국은 늘 입는 일자 청바지를 꺼내 들었다. 할 수 없지. 겨울이니까 겉옷만 신경 쓰자.
두툼한 패딩 대신 날렵하게 빠진 질 스튜어트의 진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걸치고, 붉은색 버버리 머플러를 둘렀다. '예쁘게'가 안 되면 부티라도 내고 가야지. 둘 다 프리미엄 아울렛에서 폭탄 세일할 때 산 것지만 누가 알겠어.
마지막으로 예물함에서 진주 귀고리 한 쌍을 꺼내어 양 귓불에 달고, 약간 진하다 싶은 레드 립스틱을 입술에 도톰하게 바른 뒤 씩씩하게 현관문을 나섰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에 내린 다음 네이버 지도를 보며 걸었다. 한옥들만 즐비한 골목길을 더듬더듬하며 '이런 곳에 레스토랑이 있나? 길 잘못 든 거 아니야?'라고 의심하던 차에 자그마한 간판이 보였다. 친구가 카톡으로 보내준 이름이 맞았다.
두꺼운 통유리문에 붙어 있는 금장 손잡이를 밀면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친구 이름을 대고 자리를 안내받았다. 친구는 아직 도착하기 전이었다.
실내는 밝았다. 금장 테두리를 두른 핑크색 파스텔톤의 둥근 의자가 마치 마카롱 같다고 생각하며 자리에 앉았다.
하얀색에 검정 무늬가 섞인 육중한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역시 금장 테두리를 두른 푸른 접시 두 장이 포개져 놓여있었다. '주인이 어지간히 골드를 좋아하나 보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꽤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대접시 위에 소접시를 포개어 세팅한 것이 꽤나 고급진 느낌을 주어 만족스러웠다. 슬쩍 접시를 들어 뒷면을 확인했는데 잘 모르는 브랜드였다.
테이블 위에는 수영장 키판만 한 메뉴판이 놓여 있었다. 표지를 넘겨보니 낯선 이름들이 줄줄이 나왔다. 흔히 접할 수 있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일 줄 알았는데 프렌치 레스토랑이었다.
가격도 꽤 비싸서 저도 모르게 얼른 메뉴판을 덮었다. '친구가 알아서 주문하겠지'라고 생각하다가 '그럼 나는 축의금을 얼마 내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이어지자마자 바로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못 만났다고는 하나 그래도 명색이 베프인데, 그깟 축의금을 속으로 셈하는 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친구는 금방 도착했다.
"차현아! 이 지지배. 이게 얼마만이야!"
"야, 진짜 오랜만이다. 우리 언제 보고 못 봤지?"
"너네 돌잔치 때 보고 못 봤잖아. 그때는 정신없어서 얘기도 얼마 못 했는데."
"벌써 그렇게 됐나? 우리 승이가 벌써 네 살인데. 어우, 미안해. 내가 무심했다야."
"맨날 전화하면 바쁘다고 끊고. 이러기야?"
"출산휴가만 쓰고 바로 복귀하느라 정신없었어. 우리 승이 내년에는 유치원 가니까 이제 여유 있어. 앞으로는 자주 보자."
"그래. 나 애 낳으면 네가 노하우도 좀 전수해 주라."
한바탕 밀린 인사를 한 뒤 친구는 웨이터를 불러서 주문을 했다. 웨이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신중하게 메모를 하고 가더니 이내 차가운 샴페인병과 목이 긴 잔 두 개, 올리브가 담긴 작은 접시를 가지고 돌아왔다. 황금빛 액체가 잔 중반까지 담기자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왔다. 둘은 샴페인 잔을 들고 쨘~ 하며 부딪혔다. 금빛이 찰랑였다.
그 뒤로 푸른색 접시 위에 허머스 샐러드니 보리쌀 리소토, 표고버섯 라비올리 같은 것이 서빙될 때마다 차현은 신났다. 단순히 '맛있다'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미묘하고 복잡한 맛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차현과 친구는 음식 사진과 셀카를 수십 장 찍고, 보리알의 통통 튀는 식감과 진한 표고버섯향을 감상하면서 길고 긴 수다를 떤 다음 달지 않고 쫀득한 브라우니와 뜨거운 커피로 마무리한 뒤 '결혼식 때 보자'는 말을 남기고 헤어졌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 차현은 어제 저녁 외출의 여운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오래간만에 차려 입고 프렌치 코스를 먹고 온 날을 오래도록 기념하고 싶었다.
나도 이런 데 다니는 여자야. 누군가에게 어제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자랑하고 싶었지만, 먹는 데에는 영 관심이 없는 남편한테 말해봤자 콧방귀나 뀔 게 뻔했다. 친구들의 단톡방에 난데없이 음식 사진을 뿌릴 수도 없고, 결혼 전 운영하던 블로그는 몇 년째 개점휴업 중이었다.
갑자기 '인스타그램'이란 게 있다는 말을 들은 게 생각났다. 거기가 그렇게 자랑하는 곳이라던데. 호기심에 어플을 다운받아서 가입을 해보았더니 클릭 몇 번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그녀가 좋아하는 멋진 레스토랑, 카페, 야경사진이 끝도 없이 나왔다.
어떤 것들은 분명히 집에서 찍은 것 같은데도 눈처럼 하얀 테이블보 위에 고급스러운 식기가 세팅되어 있고, 그 위에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생크림 속 빨간 딸기를 얹은 초콜릿 케이크가 놓여 있었다. 사진 밑에는 #이라는 표시 뒤에 '홈카페, 웨지우드 접시, 도레 도레 케이크'같은 단어들이 쓰여있었다. 와우, 다들 집에서 이러고 사는 건가?
한동안 넋을 잃고 감상하다가 차현도 조심스레 어제 찍은 사진 몇 장을 올렸다. 네이버를 검색한 결과 #을 달면 사람들이 내 게시물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서촌맛집 이라고 써보았다. 조금 있다가 '좋아요' 알림이 떴고, 차현은 괜스레 신이 났다.
그때부터 매일 자기 전에 인스타그램을 감상하는 것이 차현의 일과가 되었다. 다들 사진을 어쩜 그리 잘 찍는지 보는 데마다 가고 싶고, 보는 것마다 먹고 싶은 것 투성이었다. 멋지게 사는 사람들이 참 많네.
그러다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을 보면, 자신도 역시 잘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침부터 동동거리며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출근을 하느라 머리도 못 감고 사는 생활 대신, 우아하게 차려입고 프렌치 레스토랑을 다니는 인생이 그곳에 있었다. 내 삶도 썩 나쁘지 않아. 스스로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