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으니 빙긋이 웃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용건도 말하지 않고 볼 일이 있다고 사라지곤 했는데, 그것이 윤희의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했다. 그래서 그 날은 큰 맘 먹고 윤희도 웃으며 반쯤 농담처럼 말해보았다.
"무슨 일인지 말 안 하면 지유 안 봐준다."
그 순간 지유 엄마의 얼굴에 스쳐가는 표정을 보고 윤희는 아찔했다. 니가 안 봐주면 어쩔 건데. 어차피 니 자식이 울고 불고 지유한테 매달릴 거 아니야? 그 표정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어질하고 눈 앞이 핑 돌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초여름 햇살이 머리 위로 따갑게 내리꽂혔다. 아이를 잡은 손이 금방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왔다. 이거 뭐지?
윤희는 바로 그 자리를 박차고 돌아서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유 엄마는 윤희의 친구가 아니라, 아이 친구의 엄마였으니. 난데없이 사이가 틀어져 버리면 아이의 유치원 생활은 어떻게 되는 건가. 안 그래도 한 학기가 다 되도록 아직까지 유치원 적응이 어려운 아이인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다스리며 지유를 봐주고 난 그 날 밤, 여느 때처럼 아이를 재우고 스마트폰을 켜서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윤희는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지유 엄마의 피드에서, 꽃꽃이를 한 화병 뒤로 브이 자를 그리며 웃는 지유 엄마의 사진을 보았다. '오랜만의 취미 생활. 완전 힐링 ♡'이라는 설명도 붙어 있었다. 올린 시간을 보니 윤희가 지유를 봐주며 두 아이와 씨름할 때였다.
제 취미생활 한다고 나한테 애 맡기고 간 거구나. 이게 누굴 호구로 아나.
게시물을 올린 시간도 그렇지만, 윤희가 지유 엄마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올렸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심장이 미칠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깜빡한 건지, 봐도 상관 없다는 건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윤희는 지유 엄마와의 관계를 청산하기로 했다. 마침 다음 주면 여름방학이었다. 맘만 먹으면 한동안은 얼굴 보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방학은 참 길었다. 아이는 하루에 한 번씩 "엄마, 지유랑 놀면 안 돼?" 하고 보챘다. 매일 같이 얼굴 보던 사이였는데 그럴 만도 했다. 그 때마다 윤희는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서 곤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유 엄마한테서 카톡이 왔다.
"언니, 요새 뭐해요? 얼굴 보기 힘드네."
혹시라도 지유 엄마한테서 카톡이 오면 바쁜 척 하고 안읽씹(안 읽고 씹기)을 할 생각이었는데 하필 그 순간 아이가 윤희의 핸드폰을 보고 있다가 카톡을 확인해버렸다. 이런 젠장. 읽씹할 용기는 없는데. 2학기 때에도 매일 얼굴 봐야 하는데.
한참 망설이다 그냥 무난한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응 그렇지 뭐. 잘 지냈어?"
"방학하지마자 시골에 있는 지유 할아버지댁에 다녀오느라 정신 없었네요. 갔다오고 나니까 갑자기 지아가 열감기에 걸리고. ㅜ.ㅜ 완전 죽다 살아났어요."
"그래, 고생많았겠다."
"언니네는 어디 안 가요?"
"이미 친가, 외가 한번씩 다녀왔어. 우린 양쪽집 다 서울이거든."
"휴가는 안 가요?"
"남편이 바빠서 8월 중순에나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 때까지는 완전 방콕 독박육아 신세야. ㅠ.ㅠ"
갑자기 쏟아지던 톡이 잠시 멈추었고, 일 분쯤 있다가 지유 엄마가 말했다.
"오랜만에 애들 데리고 키즈카페나 갈래요?"
단단히 먹었던 맘이 조금 흔들렸다. 아침부터 밤까지 아이와 씨름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5주간의 방학 중 이제 고작 2주밖에 안 지났는데.
중간에 몇 번 다른 아이 엄마들에게 뭐하고 지내는지 넌지시 연락해보기는 했지만, 다들 할아버지댁에 간다, 여름휴가를 간다 대답하는 통에 만나자는 말도 못 꺼내고 있었다. 게다가 이미 다른 엄마들은 윤희와 지유 엄마를 베프로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지 윤희에게 먼저 보자고 말 꺼내는 사람도 없었다.
카톡 창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옆에서 아이가 옷자락을 잡아끌면서 보챘다.
"엄마, 핸드폰 그만 보고 나랑 괴물놀이 하자."
어휴, 나는 괴물이 되고 너는 용사가 되어서 또 한 시간 동안 발로 채이고 목을 졸리겠구나. 너 낳고 상한 관절도 아직 회복되지 않았건만.
에라, 모르겠다. 충동적으로 지유엄마에게 답장을 보냈다.
"오키. 언제 볼까?"
내가 일부러 데면데면하는 거 알 텐데 제가 먼저 연락한 거 보면 저도 힘들었나보지. 제가 먼저 연락했으니 조금이나마 반성하지 않았을까. 이젠 예전같지 않겠지. 뒤늦게 합리화했다.
이번 주 토요일 오후 1시에 자주 가던 옆동네 키즈카페에서 보기로 했다. 그간 집안에서 맥심 커피믹스로 연명하던 차였는데 간만에 남이 만들어 준 카페 라떼를 마시겠구나. 키즈카페이긴 하나 좋은 원두를 쓰는지 늘 향긋하고 적당히 쌉쌀한 그 곳의 커피를 생각하면서 살짝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도착하니 오후 한 시 정각. 지유 엄마는 아직이었다. 뭐, 예상하던 바였다. 지유 엄마는 시간관념이 희박한 타입인지, 사이가 좋아서 함께 여기저기를 다닐 때에도 항상 이삼십 분은 예사로 늦곤 했다. 그 때마다 "언니, 미안해요." 하며 환한 얼굴로 팔짱을 껴 오는 통에 싫은 소리 한 번 못하고 "괜찮아."만 연발하곤 했다.
괜찮아. 어차피 육아휴직 중이라 시간 많아.
괜찮아. 아이한테 친구가 생긴 게 어디야.
늘 윤희는 자신에게 속삭이면서 마음 속 저편에서 올라오는 '어휴, 여기가 회사였으면 넌 모가지야.'라는 생각을 은근슬쩍 꾹 밟아눌러왔다.
키즈 카페에 입장하자마자 아이는 알록달록한 블럭방으로 뛰어갔다. 윤희는 카운터에 서서 아이의 두 시간 입장권을 끊은 다음 "카페 라떼 따뜻한 거 주세요."라고 말한 뒤 진동벨을 받아들고 블럭방 근처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이게 얼마만에 먹어 보는 사제 커피냐. 아무래도 방학 끝나기 전에 네스프레소 머신 하나 들여놔야겠어. 요새는 값도 많이 싸졌던데. 내친 김에 우유 스팀기능 있는 걸로 살까. 아니야, 우유는 거품기를 따로 사는 게 낫다던데. 일할 때에는 맨날 구내 카페 다녀서 몰랐는데 집에 머신이 없으니까 영 힘드네. 주말에 백화점에 한 번 가봐야겠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자니 진동벨이 울렸다. 카운터에서 일회용 컵을 받아들자마자 둥근 플라스틱 뚜껑을 열고 코로 향기를 한껏 들이킨 뒤 한 모금 마셨다. 쌉싸름한 에스프레소 추출액이 부드러운 스팀 밀크에 섞여 입 안을 가득 채웠다. 캬아, 이 맛이야! 그리고 자리로 가져가고 있는데 아이가 불렀다.
"엄마, 블럭놀이 같이 해!"
아이고, 내가 그 생각을 못했네. 지유 오기 전까지는 내가 놀아줘야 하는데. 주문을 나중에 할 걸.
시계를 보니 한 시 십오 분이 지나고 있었다. 뭐, 커피 식기 전까지는 오겠지. 간만에 얼굴 보는 거라 긴장되네. 뭐라고 말해야 되나. 그냥 아무 일 없는 듯이 예전처럼 친한 척을 해야 되나?
머릿 속으로 딴 생각을 하면서 성의 없이 블럭을 올리고 있자 아이가 슬그머니 윤희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엄마, 블럭 재미 없어? 그럼 방방할래?"
윤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이구, 귀여운 것. 이게 다 너 행복하라고 하는 짓인데 내가 너한테 신경도 못 쓰고 딴 생각 하고 있었네. 미안, 미안.
윤희는 아이의 요구대로 블럭을 쌓고, 트램폴린에서 뛰고, 자석 물고기 낚시를 한 다음 다시 블럭방에 돌아와 키즈카페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한 시 사십칠 분. 뭐야, 지금 거의 오십분 째 늦고 있는 거야? 해도 해도 너무하네.
갑자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올랐다. 이삽십 분은 실수로, 어쩌다 보니 늦을 수 있다 쳐도 오십분은 아니지. 지유 엄마가 일부러 윤희를 골탕 먹이려고 그러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얼굴에 화끈 열이 달아올랐다. 그 때 마침 지유 엄마가 키즈 카페 현관문을 밀고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얼른 고개를 돌리고 달아오른 얼굴을 수습했다.
"지유야!"
놀면서도 틈틈히 문을 쳐다보고 있던 아이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두 아이는 마치 이산가족이 상봉한 것처럼 서로 얼싸안았다. 그래, 너네가 무슨 죄니. 엄마가 이 시간 잘 버텨볼게. 윤희는 마지못해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지유 엄마에게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