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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밍이 Apr 03. 2021

패닉 바잉 (panic buying)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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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집을 사는 것은 두려웠다. 시골 출신인 이수는 고작 이수가 다닌 대학교 주변과 신혼살림을 시작했던 동네 외에는 서울 지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연일 신문지상에 어느 동네 무슨 아파트에 대한 기사들이 넘쳐났지만, 부동산과 담쌓고 지내던 이수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다만 대치동이 학군지의 최고봉이라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왕 학군지로 갈 거면 대치동 입성 한 번 해봐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 남편과 함께 소위 '임장'이란 걸 가 보았다가, 노후된 아파트에 걸맞지 않은 가격에 깜짝 놀라 뒤돌아왔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아파트의 복도는 을씨년스러웠고, 어디 맘카페에서 보니 쥐가 나온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 아파트가 뭐 이리 비싸. 설령 내 자식이 여기서 서울대에 간다 해도 그때까지 버티고 살 자신이 없었다.     


다른 부모들이 새삼 대단해 보였다. '나는 그 정도의 모성애가 없는 걸까' 싶어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가, '아직 공부에 흥미 없는 아이를 무리해서 대치동에 집어넣으면 적응하기만 어려울 거야'라고 위안을 삼기도 했다.     


그렇다고 딱히 가고 싶은 지역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래저래 고민만 하면서 남은 전세기간을 보내던 중 부동산 가격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예전에 한 번 보고 비싸다고 생각했던 가격은 이제 다시는 잡을 수 없는 금액이 되었다.     


오래전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가 분양하던 때에 남편이 반 농담조로 "20평대가 9억 원이래. 5천만 원 피 주면 살 수 있다는데 어때?"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이수는 무슨 20평대가 9억 원씩이나 하나며, 거기에 피는 무슨 말이냐며(분양권에 프리미엄을 붙여 판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던 때였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는데. 이제 9억 원은커녕 그 두 배를 주고도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시중에서는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은 아크로리버파크 전용 84제곱미터'라는 농담이 유행했다. 그 참에 남편이 말한 것이었다. 시중에 역대 최대 규모의 토지보상금이 풀린다고.          



처음에는 그 말을 흘려들었다. 불안했지만 어제오늘 일은 아니었다. 아파트값이 폭등하기 시작한 지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는 때였다. 이수도 반쯤은 포기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전세 옮겨 다니면 되지. 설마 우리 가족 살 집 하나 없겠어.     


그런데 밤이 되도록 남편의 말이 머릿속에 계속 남았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집값 오르면 전셋값은 안 오르겠어.    

 

다음 날 새벽 세 시, 이수는 뭔가에 홀린 듯 일어나 컴퓨터를 켰다. 생전 들여다보지 않던 네이버 부동산에 접속했다. 볼드모트와 같은 두려움은 이만 버리자. 이제는 행동을 해야 할 때야. 내 새끼 학교 보내야지.       


먼저 가진 돈과 대출받을 수 있는 금액을 계산해보았다. 주택담보대출을 받고, 퇴직금 담보 대출도 다던데. 주식은 다 팔고, 변액보험도 해약해야겠다. 이거 왜 들었나 몰라.


그리고 뭐 더 없나? 차 두 대 중 하나를 팔까? 어차피 학군지로 가면 지하철 타고 출, 퇴근할 수 있는데. 예물도 팔아버려? 아니야, 그건 뭐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렇게 해서 금액 마지노선을 정했다.     


그리고 이수의 회사와 남편의 직장에서 출퇴근 가능한 거리에 있는 학군지 몇 군데를 추려서 마지노선가능한 아파트 목록을 엑셀로 정리했다. 모두 워킹맘인 이수가 남의 손을 최대한 빌리지 않고 아이를 학원에 보낼 수 있는 곳들이었다.     


날이 밝자마자 열몇 군데의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적당한 매물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허무하게도 네이버에서 본 최저가의 매물은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원래부터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다들 네이버 최저가보다 일, 이억 원은 더 높게 불렀다. 그마저도 며칠 뒤 다시 물어보면 오천만 원씩 더 올라 있었다.     


어쩌다 적당한 (결코 마음에 쏙 드는 게 아니라, 너무 무리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수준의) 매물을 발견하고 집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면, 아무 때나 볼 수 있는 게 아니라면서 날짜와 시간까지 정해주었다. 회사에 반차를 내고 겨우 달려가서 보면 마뜩잖은 물건이 태반이었다.  

   

한 번은 그럭저럭 마음에 드는 물건이 있길래 저도 모르게 방긋 웃으며 "괜찮네요."라고 말했다. 중개인이 번개같이 이수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주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일억오천만 원을 올려 불렀고, 이수는 빈 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불같은 상승장이었다. 매도인 우위 시장이라는 개념도 처음 알았다.          




이틀 뒤 중개인에게 전화가 왔다.

“사모님, A 아파트 매물 하나 더 나왔어요.”


지난번에 이수가 마음에 들어했다가 주인이 그 자리에서 일억오천만 원을 더 올려 부른 집과 같은 아파트 단지였다.      


“지난번 집은 거실만 확장되어 있고 서남향인데, 여기는 거실, 작은방 전부 확장인 데다 정남향이에요. 동도 로얄동이고. 저는 아직 못 봤지만 매도인 측 중개사 말이 주인이 관리를 엄청 잘했대요. 손댈 데가 없대.”

“몇 동 몇 호에요?”

“동은 306동이고... 5층이라고 들었는데 잠깐만요. 503호네.”

중개인은 이수에게 이 물건이 이전에 본 것보다 더 좋다며 열심히 권했다. 이수가 듣기에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럼 집은 언제 볼 수 있어요?”

“그게... 지금 이 집에 대기 매수자가 3명 붙어 있어요. 근데 세입자가 문을 안 열어 주네. 주인도 세 줄 때에는 팔 생각이 없어서 오래 사시라고 그랬대요. 그래서 세입자한테 강하게 요구하기 좀 그런가 봐요. 집 안 보고 사는 조건이면 바로 살 수 있는데, 보시려고 하면 언제가 될지 몰라요. 그 사이에 누가 채갈 가능성도 높고.”

“그럼 집 사도 저희 못 들어가는 거 아니에요? 저희는 내년에 애 초등학교 보내려면 꼭 들어가야 되는데...”

“전세기간이 내년 2월 말까지라 계약 갱신 안 해주면 나가긴 할 거예요.”     


집을 안 보고 산다라... 십억 원이 훨씬 넘는 물건을? 전 재산을 다 털고도 빚까지 져야 하는데? 하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제 그만 결정하고 싶었다.


네이버 부동산 사이트에 나와 있는 도면을 살펴보고, 지도로 인근 지역도 검색해 봤다. 이수 회사 근처라 낯설지 않은 동네이기도 했다. 그래, 여기로 하자.     


먼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A 아파트에 괜찮은 매물이 나왔다는데 그걸로 하는 게 어떨까?”

“얼마인데?”

“십사억 오천이래.”

“와, 너무 비싸다. 좀 깎아봐.”

“무슨 소리야. 지금 매도인 우위 시장이라고. 매수인 세 명 대기 중이래. 저것도 집 안 보고 사는 조건이야.”

“잠깐만 기다려 봐.”


수화기 저편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지더니 다시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네이버 보니까 13억 8천짜리도 있는데. 그거 어떤지 물어봐.”

벌써 물어봤어. 나갔대. 그런 거 다 미끼더라. 내가 한두 번 속은 줄 알아?”


남편의 침묵이 조금 전보다 더 길게 이어진 끝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이 알아서 결정해.”


최근 며칠 동안 이수가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지도와 부동산 사이트만 들여다보고 있던 것을 아는 남편이 끝내 허락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게. 이수는 중개인에게 전화를 걸어 집을 살 테니 가계약금을 보낼 계좌를 달라고 말했다. 중개인이 계좌를 불러주자 이수는 “지금 중요한 회의에 들어가야 해서 두 시간 뒤에 입금해드릴게요.”라고 말한 뒤 전화를 끊고 바로 택시를 탔다.     




사려는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린 뒤 이수는 중개인이 보낸 문자메시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306동 503호.     


306동을 찾아가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집 안을 들여다보지 못하면 밖에서라도 보고 싶었다. 동 바로 앞에 놀이터가 있네. 집 안에서 창문으로도 놀이터가 보이겠다. 마음에 들어.


밖에서 503호의 위치를 어림잡아 보았다. 층이 좀 낮긴 하지만 앞에 놀이터가 있고 나무도 우거져 있어서 전망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해가 잘 드는지가 문제겠지만, 어차피 대부분의 낮시간에는 사무실에 있는걸. 아이도 학교니, 학원이니 바쁠 테고.     


다음으로 306동의 현관문에서부터 아이가 다니게 될 학교의 정문까지 걸으면서 스마트폰에 있는 스탑워치로 시간을 재 보았다. 5분. 좋다. 중간에 차가 다니는 소도로가 하나 있지만 등, 하원 시간에는 안전도우미가 있을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인근에 있는 지하철역까지 걸으며 시간을 쟀다. 13분. 역세권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네. 이 정도면 되었다.      


아파트 상가 편의점에서 생수를 한 병 산 뒤 파라솔 의자에 앉았다. 뚜껑을 고 꿀꺽꿀꺽 들이킨 다음 휴우... 긴 한숨을 쉬었다.


파라솔 밖의 햇빛이 눈부셨다. 이마에 난 땀이 여름날에 걸어서인지, 긴장되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진동을 잠시 느끼고 있다가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매도인의 계좌번호로 삼천만 원의 가계약금을 부쳤다.     


부동산의 '부'자도 모르는 내가 집도 안 보고 사다니! 입금을 하고 나자 심장이 더욱 크게 뛰기 시작해서, 이수는 잠시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일생일대의 결정 앞에서 이수 안에 잠들어 있던 승부사 기질이 발동한 것인지, 아니면 궁지에 몰린 쥐처럼 패닉 바잉(panic buying)을 한 것인지는 누구도 모를 일이었다. 남편과 토지보상금 얘기를 나눈 날로부터 꼭 일주일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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