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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현 Jul 17. 2017

여기가 아닌 곳이 필요했다.

남미를 간 이유? 별 거 없다.

 남미를 가고자 하는 꿈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린 시절 이상향을 이야기하며 마추피추라는 곳이 눈에 띈 적이 한번 있었고, 우연히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던 우유니의 사진을 보고 죽기 전에 한번쯤 가보고 싶다 생각한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생각 없이 지내오다 갑자기 남미행 비행기 티켓을 예약해버린 것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서였다.


 그맘때쯤의 난 모든 것에 싫증이 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 눈 뜨는 것부터, 샤워하는 것부터, 일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주말이 싫었고, 약속이 있어 외출을 해야 하면 그것대로 싫었다. 답이 없었다. 당시 나는 선배의 사업체에서 3년째 같이 일하던 중이었다. 처음에는 재미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가, 고객응대가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첫 번째 1년이 지나고 퇴사를 얘기했고, 두 번째 1년이 지나고 퇴사를 또 얘기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선배의 만류와 알 수 없는 책임감이 나를 그곳에 머무르게 했다. 세 번째 퇴사 시도. 뭔가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공부를 할 것이라고, 다른 회사에 들어갈 것이라고 무엇이든 필요했지만 어차피 밝혀질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게 여행이었다. 최소한 반년 이상이 걸리는 여행이라면 선배도 어쩔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한번 장기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지라 선배는 여행에 대한 나의 열망을 이해해주는 것 같았다. 나에게 실제로 그런 열망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럴듯한 변명으로 나는 현실로부터의 도피에 성공했다.


 도망치듯 떠난 여행은 보통의 여행과 달랐다. 가고 싶어서 꿈꾸어보고, 그려 보고, 계획도 짜보는 여행도 재미있을지 없을지 확신할 수 없는데 어쩔 수 없이 둘러댄 여행이 준비부터 순탄할 리는 없었다. 6개월 동안 남미를 다녀보자 마음을 먹었지만, 남미는 너무나도 큰 대륙이었고, 그만큼 정보도 많았다. 남미에 볼리비아가 있고 브라질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던 나는 루트를 정하는 것부터가 힘에 겨웠다. 결국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아니 세우지 못했다. 미국에 들렀다가 가장 비행기 값이 싼 멕시코의 과달라하라로 시작하는 것 하나만 정해졌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 곳이라 스페인어를 조금 공부하고 간 것이 그나마 준비라면 준비라고 하겠다. 오히려 준비라는 미명하에 쇼핑리스트만 늘어났고 출발도 하기 전에 200만 원을 넘게 썼다.


 많이도 여행을 간다. 누구는 힘들게, 누구는 즐겁게, 누구는 환상적으로. 그만큼 여행 관련 책들도 많고 작가도 많다. 실제로 여행을 나가보니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도 진짜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여행은 힘들어도 재미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루고 싶은 로망이기도 하다. 여행지마다 펼쳐지는 새로운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보아온 풍경들은 풍경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 멋진 풍경들이 펼쳐진다. 내 여행도 그랬다. 문제는 가끔이라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는 외로웠고, 심심했고, 무료하고 무기력했다. 6 달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여행을 즐기지 못했다. 고로 실패했다.


 그 많은 여행 가이드북과 여행 수기와 여행 기사들은 어느 곳에만 가면 특별한 즐거움을 누리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심지어 그냥 떠난 여행자들도 확신에 찬 말투로 즐거움과 나름의 세계관을 가지고 그곳을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모르겠다. 즐거운 날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이 더 많았고 엄청 다르고 힘들다는 깨달음은 많이 얻었지만, 여기는 이런 곳이다, 내가 본 것들이 무엇이다 정의를 내릴 만큼 정확한 것을 얻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다니면 다닐수록 모르는 것이 많았고 섣불리 얘기하기가 두려워졌다.


 단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장소가 바뀌어도 나의 심경은 대한민국의 '여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의 여행은 여기가 아닌 곳을 찾아 떠난 것이지만 어디든지 내가 있는 곳이 여기라는 평범한 사실만을 알게 했다.


 여기가 아닌 곳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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