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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현 Jan 19. 2018

효율과 평등 사이

쿠바의 도로 위에서 생각해본 관계론

현대사회에서 원하는 곳까지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는 것은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다. 빠르게 그리고 정확한 시간에 도착함은 앞으로의 일을 예측 가능하게 하고 인간의 활동을 더욱 효율적으로 만든다. 이를 위해 자동차를 만들고 기차를 만들었으며 다시 비행기와 초고속 열차를 만들었다. 내비게이션은 단순한 길 안내를 넘어 실시간으로 빠른 길을 가르쳐주고, 원활한 교통시스템을 위한 연구는 빅데이터 기반으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빨리 가려고 할 때 장애물을 만나면 인간의 인내심은 종종 한계에 다다르곤 한다. 쉴 새 없이 울리는 경적이 있고 보복 운전이 있다. 지연에 대한 컴플레인도 단적인 예로 보인다. 


빠른 것이 중요하고 아름다우며 미덕인 문화와 삶에 익숙한 상태에서 만난 쿠바의 도로는 그간의 가치를 모조리 무너뜨리는 가치 붕괴의 현장이었다. 


아바나에서 트리니다드로 향하는 택시 안, 앞자리에 앉은 덕에 교통상황을 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빠른 택시 앞에 트럭이 천천히 가고 있다. 택시기사는 추월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트럭과 길이 엇갈릴 때까지 하염없이 트럭 뒤꽁무니만 따라가고 있었다. 답답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상황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버스가, 트럭이 나타날 때마다 택시는 속력을 줄였다. 어쩌다 한번 추월을 할 뿐이지 대부분은 자연스레 길이 갈릴 때까지 서행을 했다.


절정은 작은 마을 옆을 지날 때였다. 졸면서도 느꼈다. 이건 뭔가 너무 느리다. 눈을 떠보니 앞 차가 천천히 가고 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앞으로 앞으로 시선을 옮기니 자동차의 행렬 앞에 마차 한 대가 있었다. 어쩌면 뛰는 것보다 느린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 마차 뒤로 열 대가 훨씬 넘는 자동차가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었다. 왕복 2차선 도로의 반대쪽에도 차들이 많이 있어 추월도 여의치 않았다. 웃긴 것은 반대 차선도 마차 하나를 앞에 두고 퍼레이드 하듯 자동차가 이어져 있단 것이다. 


저 마차는 무슨 똥 배짱으로 도로를 점유하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인가? 불만과 지루함이 가득 차며 좁은 택시 안의 공기가 더욱 답답해졌다. 운전대를 빼앗아 직접 운전하고 싶은 충동이 몇 분에 한 번씩 찾아오던 쿠바 여행 초반이었다. 


하지만, 쿠바에 적응해 나가는 것인지, 한국 물이 빠지는 건지 여행 후반에 들어서면서 도로를 바라보는 시각이 조금 바뀌고 있었다. 자전거 뒤에 마차가, 마차 뒤에 오토바이가, 오토바이 뒤에 트럭이, 버스가, 승용차가 잇따르는 비효율적인 모습이 쿠바를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쿠바 혁명 이래로 '하나의 쿠바'라는 기치 아래 남녀 간의, 출신 국가 간의, 피부 색깔 간의 차별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쿠바라고 했다. 쿠바인이라는 타이틀 하나면 모두가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직 자본주의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들이닥치기 전, 쿠바 사람들에게 우선순위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은 돈이나 효율성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먼저 차지함인 것 같았다. 


나보다 느리지만 나보다 먼저 이 도로를 사용하고 있는 자전거에게, 마차에게 기꺼이 우선권을 주고 자전거, 마차의 이용자도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전혀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그렇게 꽉 막혀 있는 도로 사정 속에서도 경적을 울리며 재촉하는 경우를 볼 수 없었다. 경적은 추월하는 순간 서로의 주의를 위해서 한두 번 울리는 것이 다였다. 


충분히 빠른 기차도 더 빠른 KTX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켜줘야 하고 제한 속도의 끝까지 달리고 있지만 뒤에 따라오는 더 빠른 차로부터 알게 모르게 압박을 느껴야 하는 한국과는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너와 내가 있는 가운데 누가 더 크냐, 누가 더 빠르냐, 누가 돈이 더 많냐 등 조건이 관계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먼저 온 사람이 권리를 갖게 되는 지극한 평범함이, 극도로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상황이, 에누리 없는 평등함이 문득 부러워지는 풍경이었다. 


*큰 도시 안에 있는 도로 위에서는 다른 모습이 펼쳐집니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익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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