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전북 익산에서 살 때 석 달 동안 건설현장 일을 해본 경험이 있다. 영등동 어느 초등학교 부근 아파트 현장에서다. 마침 잡부 일자리가 있어 바로 일할 수 있었다. 입고된 자재 정리, 청소, 재활용할 굵은 각목(현장 용어로 오비끼)에 박힌 못 빼기 등 자질구레한 일들이다. 노루발 못뽑이(현장 용어로 빠루)로 못을 빼는 일이 쉬울 것 같지만 하루 종일 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일용직은 비가 오거나 하면 일을 못하게 돼 공치는 날이다. 그래도 인력사무소에서 온 작업자들처럼 일당의 10%를 떼이지 않으니 큰 혜택이다.
건축현장에서는 하루에 일을 네 번 시작하고, 쉬거나 끝내기를 네 번 한다. 아침 시작과 오전 참, 점심, 오후 참 그리고 작업 끝내기이다. 나는 정해진 시간에 시작하고 끝낸다. 꾀를 부리기는커녕 남들 담배 피우는 시간에 못 피우는 나는 쉬기가 멋쩍거나 지겨워 눈치껏 일을 하게 된다. 회사에 지나치게 충성하면 동료들에게 밉보이기 때문이다. 지시받은 일은 물론, 정돈 등 시키지 않은 일까지 알아서 척척 열심히 한다. 일 시작한 지 일주일 만에 현장 관리과장에게 불려 갔다. 그날부터 내 호칭이 반장이 되었다. 호칭뿐 아니다. “문 반장님은 앞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현장에 나오십시오.” 그 말에는 비가 와서 일을 못해도 일당을 주겠다는, 소위 직영 작업자로 일하라는 말이다.
주말에 직장 동료였던 강병호 씨(가명) 부부를 만났다. 나를 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나중에 들었지만 한여름 뙤약볕에 콧등과 볼, 귀가 까맣게 탄 내 모습을 보고 그랬단다. 막노동을 하느라고 그랬으리라고는 생각을 안 했단다. 내 딸이 현장 바로 옆 이리동초등학교에 다닌다. 건설회사가 학교 운동장에 콘크리트 조회대를 설치해 소위 기부채납 하기로 한 그곳에서 일하게 됐다. 내 딸을 배려해서 친구들이나 딸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안전모를 푹 눌러쓰고 학생들의 눈을 피하며 일을 했다.
그 후 7년이 지나 서울에서 컴퓨터학원을 운영했다. 당시 학교와 구청의 무료교육, 학원 난립, 수강생 모집난 등으로 운영이 어려울 때다. 왕십리 로터리 부근으로 아침 운동을 나갔다. 다섯 시가 좀 지난 시간에 웬 배낭 멘 사람들이 전풍호텔 옆 건물 3층을 오르내린다. 인력사무소였다. 며칠 뒤부터 건설일용직 일을 시작했다. 다녀보니 그날그날 일당 7∼8만 원을 현금으로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작업복과 작업화가 든 배낭을 메고 인력사무소에 들려 현장을 찾아가야 하고, 끝나면 또 가서 일당을 받아와야 하는 것이 불편하다. 아침에 나갔지만 때로는 일자리가 없어 되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일을 하더라도 인력사무소에 일당의 1할을 떼인다.
성동우체국과 무학여고 사이 이수건설 아파트 모델하우스 짓는 곳이 있었다. 현장사무소에 일자리를 부탁했더니 연락이 왔다. 이수건설 하청 인테리어 업체 A라는 회사이다. 그곳은 인력사무소를 통해 일하는데 비해 얼마나 편한지 모른다. 날마다 작업복이나 신발이 든 배낭을 메고 다니지 않아도 되고, 공사현장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니 차비도 들지 않는다. 퇴근길에 노임 받으러 인력사무소에 갈 일도 없고, 물론 공치는 날도 없다. 무엇보다 노임 일부를 떼이는 일이 없으니 인력사무소 일용직에 비해 얼마나 좋은가. 모델하우스 짓는 일이 끝나고 방배동 대우유로카운티라는 아파트 현장에서 일하게 됐다. 건축현장에는 주의사항이 많다. 규칙에 따라 하라는 것은 하고, 말라는 것은 안 하면 된다. 나는 언제나 시키는 대로 안전모에 턱 끈 매는 것은 물론 안전화에 각반(안전화 위 발목에 메는 헝겊 띠)까지 깔끔하게 복장을 갖추고 일한다. 평소 나를 눈여겨본 대우건설 안전과장이 현장 재해방지에 기여했다며 나를 추천해 상장과 손목시계 두 세트를 상으로 받았다. 막노동판에서도 상을 주더라.
세상에는 정말 편한 일자리가 다 있다. 한두 시간이면 하루 일거리를 다 해치울 수 있으니 말이다. 한 달 가까이 그런 생활을 했다. 일이 편해 복에 겨운 것이 아니라 할 일 없이 시간 보내기가 더 힘들었다. 누가 뭐라고 하는 건 아니지만 원청업체 직원 눈치도 살피게 된다. 며칠간 노동부 일자리 사이트 워크넷을 뒤졌다. 구인광고를 찾아 서초동 E사에 입사서류를 냈다. 바로 면접을 보고 삼일 만에 입사했다. 타일, 미장, 조적, 방수공사를 하는 중견 전문건설업체이다. 원부자재를 기공이 일하기 쉽도록 옮겨 주기도 하고 청소 등 잡다한 일을 하는 보조공 일이다. 타일, 미장, 조적, 방수공사용 자재는 부피가 작아도 무척 무겁다. 아침마다 출역 일보(현장 용어로 데스라)를 작성해 제출하는 것도 내 몫이다. 현장에는 다데, 요꼬, 바라시, 오사마리, 와리, 가네, 데마찌 등 작업 용어와 기리, 노미, 고데, 반생 등 공구나 소모품 등 일본어가 많이 사용된다. 나는 종합 금속제품 제조업체에서 여러 해 공작기계가공 경험이 있다. 일본어학원에서 공부한 적도 있다. 용어를 이해할 수 있어 현장적응이 쉬웠다.
노동이 힘들어도 흘린 땀은 나를 참 행복하게 했다. 그걸 맛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속된 말로 막노동판에서 박박 기고 있는 사이 몇 달이 지나자 사무실에서 일하란다. 부장 발령을 받았다. 현장 조공이 부장 됐다 하니 같이 일하던 현장소장들, 작업자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업무용 자동차와 휴대전화기, 법인카드를 받았다. 하는 일은 사무실 내부 업무는 물론, 사장 대신 기관이나 기업체 회의 참석, 전국 현장 품질관리, 수주 입찰을 위한 현장설명회 참석, 그리고 작업자가 필요한 공구를 사다 주는 일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일인다역으로 일했다.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고 믿어주는 사람에게 목숨도 바친다 했던가. 8년 4개월간 열심히 일하는 동안 노동 관련 학술연구단체로부터 근로평화상으로 큰 상금도 받았다.
일흔이 넘은 지금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아파트 단지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건축현장 경험이 없었더라면 관리소장이 될 수 없었을지 모른다. 설령 됐어도 일을 잘 처리할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축현장에서 일하기를 꺼린다. 그래서 3D업종으로 분류한다. 나는 건축현장일이야말로 직업 중 좋은 직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겠다. 나같이 가방 끈 짧은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이유는 노동의 대가로 인한 행복감이다. 밥맛 좋고, 잡념 없고, 잠이 잘 와 건강에 좋다. 투자하지 않아도 벌이가 괜찮으며, 노동으로 인한 돈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낀다. 무엇보다 건축을 알면 사는데 활용할 곳이 많다. 건축 일을 해 보라고, 특히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노후를 대비해서도 그렇다. 건축 현장 일을 알아야 아파트나 빌딩을 관리하는 경비원으로 취업하더라도 일을 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사는 집도 잘 관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