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의 가장 깊은 모순 중 하나는, 국민의 절반 가까이가 종교를 믿고 있음에도 여전히 자살률과 이혼율, 범죄율이 OECD 국가 중 최상위권이라는 사실이다. 수많은 종교시설과 신도들이 활발히 활동하지만, 삶의 고통을 반영하는 통계는 나아지지 않는다. 이 역설적인 현실은 종교가 과연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반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한국 근대 종교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강화도로 시선을 옮겨본다. 강화도는 외세의 침입과 근대 문물이 교차한 공간이자, 신앙과 전통이 충돌하고 융합하던 현장이었다. 복음을 전하려던 서양 선교사들과 유림 세력이 신념과 문화를 걸고 맞섰던 그 땅에는, 갈등 속에서도 공존을 모색하던 역사의 층위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인구 7만 명의 섬에 교회만 210개, 그중 100년을 넘긴 교회가 59곳이라는 사실은 강화도가 얼마나 오랜 세월 종교적 열정의 불씨를 간직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교산교회의 ‘선상 세례’는 단순한 의례가 아니라, 신앙이 현실의 장벽을 넘어서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강화도의 초기 신자들은 오늘날 종교가 되찾아야 할 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배당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믿음 안에서 하나 되자’는 의미로 이름에 ‘일(一)’ 자나 ‘신(信)’ 자를 넣어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두었다. 홍의교회와 교동교회의 신자들은 빚을 탕감하며 서로의 짐을 덜어주고, 독립운동에 참여했으며, 맹인을 위한 한글 점자를 만드는 등 믿음을 정의와 봉사로 확장했다. 그들의 신앙은 건물의 규모나 교세의 크기가 아니라 ‘신행일치(信行一致)’, 즉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중시했다. 대한성공회 강화읍성당이 한옥 양식을 고집했던 것 또한 신앙을 이 땅의 전통과 문화 속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깊은 뜻에서였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는 당시의 순수한 열정에서 멀어져 있다. “믿으면 잘살게 된다”는 단순한 문장이 영적 성찰을 대신하고, 종교는 번영과 축복을 약속하는 현실적 신앙으로 바뀌었다. 화려한 예배당과 대형 사찰이 경쟁하듯 들어서고, 종교는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위안제나 성공의 부적으로 소비되고 있다. 그 결과 종교가 지녔던 도덕적 영향력은 약화되고, 영적 각성과 사회적 실천의 힘은 점점 희미해졌다.
특히 종교 지도층의 도덕적 해이는 종교 전체의 신뢰를 무너뜨린다. 종교는 본래 부패한 권력에 맞서고 약자의 편에 서야 하지만, 일부 대형 종교는 세속의 논리에 휘말려 권력과 자본에 밀착한다. 거액의 헌금을 강조하고 교권을 세습하며, 내부의 비리와 성추문이 이어지는 현실에서 신앙의 도덕적 권위는 설 자리를 잃는다. 경건을 설교하지만 탐욕을 버리지 못하는 지도자의 모습은 신도들에게 이중의 메시지를 남긴다. 그 결과 신도들은 종교적 윤리를 삶의 기준으로 삼기보다 “나도 성공해야 한다”는 욕망을 신앙으로 오해하게 된다. 지도자들의 탐욕은 종교의 예언자적 사명을 흐리게 만들고, 사회적 정의를 세워야 할 본연의 기능을 마비시킨다.
이 괴리는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결합할 때 더욱 두드러진다. 종교는 인간의 내면을 위로할 수 있지만, 빈곤과 실업, 불평등, 경쟁으로 인한 고립 같은 구조적 문제를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절망 끝에 스스로를 벼랑으로 내모는 개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기도나 위로가 아니라, 공정하며 따뜻한 사회적 안전망이다. 종교가 설교의 언어를 행동으로, 위로의 마음을 연대로 바꾸어야 비로소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종교와 사회가 함께 변해야 한다. 먼저 종교는 성찰과 실천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강화도의 초기 교회들처럼, 교세 확장보다 불의에 맞서고 소외된 이웃을 품는 신행일치의 모범을 회복해야 한다. 지도자들은 투명성과 도덕성을 높이고, 교파의 벽을 넘어 사회의 빛과 소금으로 거듭나야 한다. 동시에 사회 역시 구조적 결함을 정면으로 고쳐야 한다. 범죄와 자살은 개인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고립과 불평등이 낳은 결과다. 빈곤, 정신 건강, 교육과 노동의 불공정을 개선하고, 출소자나 사회적 약자가 다시 설 수 있도록 실질적 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의 뿌리는 우리의 전통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예로부터 조상들은 향약(鄕約)으로 마을의 도덕을 세우고, 두레와 품앗이로 서로의 삶을 지탱했다. 나눔과 협동의 문화를 미덕으로 여겼던 공동체 정신은 오늘날 종교가 되살려야 할 본질이다. 하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던 조상들의 지혜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말속에 이미 새겨져 있다. 그것은 특정한 교리나 종파를 넘어 모든 이의 삶을 이롭게 하려는 궁극의 마음이었다. 종교가 다시 그 마음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구원과 행복이 한 자리에 설 수 있다.
강화도의 오래된 교회들이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바닷바람 속에서도 꿋꿋이 서 있듯, 한국의 종교 또한 폭풍 같은 시대를 견디며 뿌리를 내려왔다. 이제 그 뿌리에서 돋아날 새싹은 개인의 안락이 아니라, 고통받는 이웃과의 연대,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열매여야 한다. 조상들의 슬기와 신앙의 본뜻이 다시 만날 때, 우리는 자살률과 범죄율이라는 슬픈 통계 너머에서 희망의 등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함께 짊어지는 것이 오늘날 한국 종교인,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