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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활수 Jan 31. 2022

막간 월요 수필 -  각자의 골목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겨울의 풍경이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재작년 겨울의 눈 내리던 골목길이 그렇다. 서울에서 송년회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늦은 밤이었지만 버스 안은 연말 모임 후 귀가하는 승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창밖으로 함박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막차는 이름 모를 외곽 순환도로를 달려 소도시의 오래된 마을에 도착했다. 내리자마자 눈앞에서 수많은 눈송이가 바람에 흩어지는 것을 봤다. 그 어마어마한 양이 무색하리만치 고요한 폭설이었다. 그런데 그 폭설 속에서 누군가 주저앉아 있었다. 파란 대문 집 첫째 딸인 숙자 언니였다.



그녀의 지능은 어려서 앓았던 심각한 열병의 후유증으로 아홉 살에 멈춰 있었다. 짓궂 꼬마들이 그런 그녀를 놀리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장난이 심하다 싶을 때는 내가 주의를 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언니에게서 '언젠가 내 친구가 될 수도 있으니 너무 혼내지는 말아줘.'라는 따뜻한 부탁을 들은 후에는 그마저도 하지 못했다.  나는 약국 앞에 앉은 그녀에게 다가갔다.  


 언니 뭐 해? 무슨 일 있어?  


 언니가 무릎에 파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눈가가 붉게 젖어있었다. 옆으로 자리를 잡고 앉자 코를 훌쩍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보리가 보고 싶어.


 아, 보리. 보리는 언니가 아홉 살 때부터 함께 살기 시작한 반려견이었다. 하루 종일 말동무 하나 없었던 언니의 곁에서 오랫동안 친구가 되어준 보리. 보리는 언니가 스물둘이 되던 해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렀지만, 매해 오늘처럼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이면 그녀는 눈을 좋아하던 보리와의 추억에 사로잡혀 집 밖으로 나와 울곤 했다. 나는 잠시 기다려보라는 말을 남기곤 근처 편의점에서 따뜻한 마실 거리를 두 개 사서  꿀차를 그녀에게 건넸다.  


보리는 왜 죽은 걸까? 나하고 영원히 살면 좋았을 텐데.


 나는 달리할 말이 없어서 캔커피를 뜯어 한 모금 마셨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런데 언니, 죽는다는 건 겨울이 오면 눈이 내리는 것과 비슷해.

겨울이 와서 눈이 내리는 건 당연한 거잖아?  

저번에 언니가 가져온 책에서 읽었던 것 기억나? 태어나면 언젠가 죽는다는 게, 슬프지만 당연한 일이라는 이야기 말이야.

응. 기억나.


 언니는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했다.


한 번 태어나면 누구나 죽게 돼. 겨울이 되면 눈이 내리는 것처럼 당연하게 정해진 일이라 어쩔 수 없어.  그렇지만 보리는 살아 있을 때 언니와 언니네 가족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잖아. 그래서 지금 아마 잘 지내고 있을걸? 아주 행복하게.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어른들에게는 뻔했을 그 위로에 오히려 안심이 된 듯 어렴풋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도 죽으면, 보리를 만나게 되겠지?

그럼! 대신 아주 나중에. 보리도 언니를 사랑했기 때문에 언니가 빨리 죽는 건 바라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이렇게 추운 날에 언니가 밖에 나와서 우는 걸 알면, 보리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잠시 눈물을 닦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 오늘은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


 언니는 괜찮다며 말리는 내게 한사코  팔짱을 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작은 설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파란 대문 집 앞으로, 혹은 자신의 시간만 멈춰 홀로 쓸쓸했을 그녀를 키워낸 골목길 위로.


눈이 쌓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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