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동이라고 불리는 작은 동네가 있다. 화정동의 옛말은 꽃우물(花井)로, 마을의 우물에서 크고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됐다. 시간이 흘러 사람들의 터전이 화정동에서 옆 동네로 옮겨지면서 이 우물의 쓸모가 없어지자, 마을 어른 중 누군가가 우물의 입구를 단단히 봉했다. 모든 낡고 병든 것들이 그러하듯이 꽃우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갔다. 이후 인적이 끊긴 화정동 어귀는 사계절 내내 무성한 풀밭과 이름 모를 들꽃 군락이 만발했고 당연히 길 건너 초등학교를 다닌 아이들의 단골 놀이터가 됐다. 때때로 나를 포함한 친구들은 도시락 가방을 들고 그곳으로 소풍을 갔다.
주로 떨어진 꽃잎을 주워 돌로 빻아 요리놀이를 하거나 돗자리 위에 도시락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뛰어놀다가 해가 질 무렵이면 배가 고파져 허겁지겁 주먹밥이나 쑥개떡을 먹는 식의 단순한 소풍이었다. 쑥개떡은 할머니들이 근처 고가도로 다리 밑에서 뜯은 쑥으로 반죽을 만들어 소금과 설탕 간을 하고 밥통에 쪄낸 떡이었다. 볼품이 없어 이런 개떡 같은, 할 때의 그 개떡이 이름으로 붙었다고는 하지만 맛으로 따지면 참 억울한 이름이었다. 짭짤하고 달달하고 쫄깃쫄깃한, 알싸한 쑥 향이 혀끝에서 맴도는 맛. 나와 친구들은 쑥개떡을 죽, 죽, 찢어먹으며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숨바꼭질을 하는데 한 친구가 없어졌다. 계절은 가을과 겨울 사이, 그러니까 해가 떨어지면 꽤 쌀쌀해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우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이인 일조가 되어 친구를 찾으러 흩어졌다. 짝이 된 남자애와 여기저기 살피는데 별안간 꽃우물이 떠올랐다. 우리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우두커니 앉은 깜깜한 우물을 상상하니 어쩐지 오금이 저려서 얼른 가자! 빨리 다녀오자! 같은 말로 큰 소리를 치며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어느덧 노을이 짙게 깔려 사방은 어두운 주황색 땅거미가 내려앉았고 우물은 여전히 나무판자로 닫혀 있었다. 사라진 친구가 아무리 짓궂은 아이였어도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의 근원지인 저 우물에 들어갈 리는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또렷하게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다섯 번 정도 불렀을 때 친구는 ‘내가 이겼다!’라며 뒤에 있던 나무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덕분에 우리는 놀라서 뒤로 나자빠졌지만 그 친구의 장난스러운 모습을 보니 오히려 안심이 되어 한참 웃었다. 문득 우물 안이 궁금해진 우리는 힘을 합쳐 나무판자를 치워보기로 결심했다. 물론 겁에 질려 끝까지 밀지 못해서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지만 삼분의 일쯤 드러난 틈새로 부는 찬바람에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았다.
바람에 실려 온 그것은, 분명 우물 밑에서부터 올라온 꽃향기였다. 우리는 볕도 물도 들지 않았을 그 속에서 다시 꽃이 필 리 없다며 단언하기에 앞서 오래전 이곳에서 꽃을 피워내 많은 이에게 사랑받았던 우물의 마음이 향기가 되어 퍼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여지를 두기로 했다. 말하자면 열 살짜리 소년소녀들의 순도 깊은 의리였다고 할까. 우리가 맡은 향기의 정체는 그렇게 셋만의 비밀이 되었다.
화정동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대도시로 떠난 뒤 외식촌으로 만들어졌다. 온통 단풍으로 물들었던 어느 휴일, 가족과 함께 칼국수를 먹고 디저트가 맛있다는 카페로 향했다. 그런데 장소가 주는 느낌이 익숙해서 커피가 나올 동안 잠시 주위를 둘러보니 가게 뒤편에 우물이 있었다. 나는 사라진 친구를 찾던 어린 날의 그 마음으로 천천히 우물 앞으로 다가갔다. 여전히 입구는 닫혀 있었지만 헐거워진 나무에서 믿을 수 없이 아득하고 다정한 향기가 올라왔다. 그리고 이내 추억의 심연으로부터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더 깊은 곳으로 파묻혔을, 우리의 호우시절 같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