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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혁 Nov 02. 2020

無想(무상)의 시대 [상]   

<유리알 유희(헤르만헤세)>를 읽고

0.

유리알 유희: 사유, 사색, 명상의 놀이. 영혼의 고양, 삶의 중심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정신적으로 가장 고도화된 형태의 유희


1.

    사유, 사색, 명상. 이런 것들이 어떻게 ‘놀이’가 될까 싶지만 ‘유리알유희’야 말로 요즘 같은 잡문시대*에 우리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놀이의 형태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혹자는 유희, 놀이라는 것은 행함으로써 오는 즐거움이 바탕이 돼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사색과 명상이 놀이가 될 수 있겠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사색과 사유와 명상이 가장 높은 단계의 유희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겪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고귀한 즐거움인지를, 전에 다른 어떤 것으로는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기쁨을.


[*잡문시대: 정신을 쓰는 법을 몰랐던, 정신에게 합당한 위치와 기능을 부여할 줄 몰랐던, 유난히 ‘시민적’이며 지나치게 개인주의를 숭배하던 시대를 나타내는 유리알 유희 내 표현. 결코 정신적으로 빈곤한 시대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정신은 넘쳐났고 단지 그 정신으로 스스로를 강하게 하는 것에 있어 부족했던 시대.]


    잡문시대를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바로 그 시대에 살고 있으니까. 누군가 서울대학교대나무숲에 쓴 표현을 빌리자면 우리의 시대는마치 구멍이 없는 도넛처럼  빈틈이 없다. 우리의 상상력이 침투할 빈틈 말이다. 이 한 시대의 사건은 너무나 서글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2.

    어릴 적 책 좀 읽으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그 옛날에 요즘에나 유행할 것 같은 책 배달 서비스를 구독했던걸 보면 우리 엄마의 교육열은 참 대단했던 것 같다. 사실 우리 집 자체가 독서가 장려되는 분위기는 애당초 아니었기에 엄마가 나에게 무슨 생각으로 책을 읽히려 했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짐작이 가지 않지만 책이 올 때마다 엄마가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있다.

“책을 읽어야 상상력이 생기지”

    상상력? 8살이었던 내게 상상력이란 공상만화나 SF영화에서 로봇들이 싸우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그런 비슷한 것이었고, 그것을 발휘할 일이라고는 1년에 한 번 있던 과학의 날 ‘미래도시 그리기’에서나마 영화에서 봤던 장면을 비슷하게나마 애써 그려내는 정도였다. 그때 내가 책 대신 몰두했던 것은 단연 컴퓨터였다. 태어날 때부터 컴퓨터를 접했던 우리 디지털 세대들에게 어쩌면 독서는 저 멀리 뒷전으로 밀려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독서는 오후 네시의 따분함 같은 것이었다.


    실망스럽게도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말은 적잖이 효과가 없었던 것 같다. 어린 나를 자극하기에 너무나도 상상력이란 단어가 너무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한다는 것. 단순히 책의 줄거리를 머리에 그리며 그 흐름을 따라가는 것일까. 물론 책에 따라 그 과정이 즐거울 때도 있었지만 독서가 단순히 이야기에서 흥미를 느끼는 유희라면 텍스트가 디지털 미디어를 이기기는 여간 쉽지 않았던 것 같다. 티비나 컴퓨터 같은 것들 말이다. 사실 그것들은 너무 고약하다.


3.

    내 인생 27년 중 대부분의 시간을 네트워크에 휘둘리며 보냈다. 이제나마 조금은 그것들에 대하여 비판적이게 아니, 사실은 극단적인 시선으로 그것도 아니면  반쯤 사악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다.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죄책감을 느끼며 마치 어둠 속에 빛을 뿜는 액정 속으로 ‘후우욱’하고 상상력이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불쾌한 감정을 느끼곤 했다. 그러고는 이 지긋지긋한 환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를 ‘유리알유희의 부재’라고 콕 집어 써 놓았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를 쉬지 않고 공유되는 시대에 산다.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는 컨텐츠들, 공유되는 정보들을 하나, 둘씩 클릭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우리의 지식 흡수 형태를 보자면 마치 ‘고장 난 수도’로 물 받는 식이다. 사실 물은 일찍이 다 채워졌다. 하지만 멈출 줄 모르고 새는 물 덕에 결국 넘쳐흐른다. 방금 집어삼킨 것들이 먼저의 것들을 밀어내고 밀려난 녀석들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개중에는 다소 선명한 이미지로 저장되는 것들이 있는데 그것도 거기까지. 그 이상의 사유로 이어지지 못하며 우리는 내재화에 실패한다.


    무엇이 우리에게 유리알유희의 기쁨을 앗아간 걸까. 한 친구가 ‘요즘 애들은 떠 먹여줘야 먹을까 말까야’하며 푸념했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 유튜버란 직업이 새롭게 등장하였고 우리는 이들을 통해 고급지게 잘 정돈된 지식을 정성스레 대접받는다. 더 이상 지식을 갈망하며 고군분투하던 시간은 없다.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이지 간사해서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읽으며 섭취했던 지식들을 이제는 언제, 어디든 내가 무얼하던 간에 간편하게 취식하길 원한다.


    유튜브는 요즘 우리 같이 바쁜 사람들에게 얼마나 최적화된 매체인지, 나 조차도 빨간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친다. 이것이 정말 필요한 정보인지 아닌지 지각하기도 불가능한 순간에 도달하기도 하지만 그것을 자각한다 할지라도 멈추는 것은 쉽지 않다. 이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는 너무나 환멸을 느끼게 함과 동시에 즐겁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Fucking 유튜브 XXX, 책 읽기”라는 문구를 방에 크게 붙여놓고 유튜브보다 책을 지향하겠노라 다짐을 하기를 반복했다. 예상했던 대로 실패 할 때마다 반복 되는 자괴감과 죄책감은 나를 더 작아지게 했고 그 감정을 회피하기 위해 다시 찾는 것은 역시나 유튜브였다. 그리고 그 때마다 다시 찾을 때의 죄책감 역시 옅어졌다. 침대에 누워 몇십 분째 바보 같은 영상들만 보며 멈춰있었다. 생각하는 행위를 멈췄다는 것에서 오는 죄책감에, 스스로 바보가 되기로 결심한 것만 같은 자괴감에 꽤나 혼자 속앓이 했다.


    물론 어느 매체를 이용하든 우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감화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비디오, SNS를 비롯한 수동성을 강요하는 매체의 가장 큰 약점은 그것의 가장 큰 강점이기도 한 연속성, 끊임없이 발광하는 디스플레이이다. 장면의 연속은 스스로 사고할 틈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 장면들을 송출하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의 사고의 기회는 박탈당한다. 흥미진진한 이야기 도중에 멈춤 버튼을 누르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비디오가 우리의 상상을 앗아가는 메커니즘이다. 좀 전에 언급했듯이 연속의 순간에도 영감의 순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박탈당한 기회 안에서 그것들이 존속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유의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우리들만의 것이 들어가지 않을 때 그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결국엔 잃어버리고 만다. 첫 순간에는 선명한 이미지로 떠오를지 모르지만 그것을 내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며 결국에는 희미해지다가 잊혀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그것을 내 언어로 감상문을 쓴 사람과 스치듯 기억하는 사람을 비교해보면 그 깊이의 차이가 여실히 드러난다.


    반면 책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언가를 느낀 바로 그 순간 멈춰 설 수 있다. 어떤 문장이나 단어, 음절 어디서던 간에 멈춰야 할 때 멈출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원할 때 다시 복귀하는 것이다. 여기가 빈틈이다. 상상력이 들어갈 틈이 바로 이곳이다. 이 곳에서 우리는 콩알부터 광활한 우주까지 틈을 넓힐 수 있다. 하지만 알다시피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사실 보기보다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다. 집중해서 한 글자 한 글자에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그 흐름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독서는 너무나 귀찮고 책이라는 것은 이제는 점점 방 한구석 책장으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너무나 바쁘지 않나.



4.

    그렇지만 나로서는 아직까지 종이책 텍스트를 버릴 수가 없다. 내가 유독 때 묻은 물건에 대해 가지는 애착이 크기는 하지만 그런 점을 차치하더라도 나는 요즘 신문물로 받아들이는 지식들을 좀처럼 잡아둘 수가 없었다. 어디론가 금방 흩어져 버리는 느낌이랄까. 물론 이런 성향 때문에 얼리어답터는 고사하고 현대 문물을 사용하지 못하는 뒤떨어진 신세대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적지 않지만.

    나는 그래도 종이 책을 읽는 게 좋다. 그 종이의 질감을 느끼는 게 좋고 책마다 다른 무게감이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직접 텍스트를 읽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각과 사유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점. 들어오는 정보를 수동적으로 단순히 머리에 저장하는 메커니즘을 따르지 않게 되는 점이,. 읽은 내용을 나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한번 더 사고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 점이 마음에 든다. 이 과정 자체가 생각이며 사유이고 이러한 과정의 결과물이 곧 상상력이다. 이것이 내가 텍스트를 신봉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는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상상의 시간을 확보하기로 했다. 빈틈을 벌려보기로 했다. 내 전략 중 하나는 자기 전 단 20분만이라도 핸드폰을 멀리하고 책을 읽거나 상상에 빠져 보는 것. 물론 시간이 비교적 많았던 학생 때는 자극적이고 빠른 정보에 취약했으며 직장을 가진 지금에도 지친 심신을 이끌고 집중하여 책 속에 빠져드는 일은 큰 체력소모가 필요하기 때문에 편하게 접할 수 있는 인스타와 유튜브를 자연스럽게 켜는 일이 잦기는 하지만 손 놓고 있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고하기를 멈춘다면 빈 껍데기로 살아가야 할텐데. 껍데기는 가라!

     니체가 우리의 존재 의미에 대해 건너가는 다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우리는 벼랑 위의  위에  발짝  내딛을  있게 된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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