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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재혁 May 03. 2020

관성의 법칙

[책리뷰] 헤르만 헤세 <지와 사랑>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때가 몇 번 온다고 합니다. 그 시점에 서 있다면 한 번 읽어 보면 좋을 것 같네요. 헤르만 헤세 작품 중 처음 읽어본 작품인데 작가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얼마나 고독했는지가 선명하게 그려졌습니다. 몇 년째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던 저에게 미풍이 되어 바람의 방향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1. 관성


관성. 물체에 가해지는 외부 힘의 합력이 0일 때 자신의 운동 상태를 지속하는 성질. 질량이 클수록 관성도 크다 <네이버 백과사전>



  관성이란 참 무섭다. 우리를 가만히 멈춰 있게도 하고 저 멀리로 보내 버려 돌아올 엄두도 나지도 않게 한다. 그 관성이란 놈이 나의 26년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중간중간 길에서 벗어나 보려 몸부림치는 순간도 많았지만 힘이 너무 강해 그 통제를 벗어나기가 도무지 쉽지 않다. 나를 포함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관성의 영향력 아래 산다. 심지어는 힘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힘을 벗어난 사람들에게 우리는 용감하다는 수식어를 붙여준다.




  관성에서의 탈출은 길 수도 짧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고통스럽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단순한 문제일 수도 있다. 내가 골드문트에 감정이 이입되면서도 괴리를 느꼈던 건 나는 아직 관성에 이끌리고 있지만 골드문트는 뚫고 나갔다는 점이다. 내가 정말 이 힘을 뚫고 나가는 것이 맞는 것인지 자꾸 나에게 묻는 것 자체가 나를 안전함 속에 가두기 위한 자기 방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 놓이는 것이 무서워 피하고 피해왔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에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을 묻는 것이야 말로 이 힘을 부숴버릴 가장 큰 무기이지만 '근데 그래도 너 지금 하는 건 잘하잖아'라는 방패로 항상 막아왔다.



  니체의 책을 읽으면서도 그 말에 따라 살기는 정말 어렵다. 위험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감수해야 할 것, 책임져야 할 것이 많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에 선뜻 실행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이 말 또한 변명이란 걸 나도 아는 게 제일 괴롭다.



  관성은 질량이 클수록 강하다. 삶에서의 질량이란 내가 투자해온 시간이 아닐까 싶다. 내가 들여온 공이 클수록 놓아 버리기 쉽지 않은 게 당연하고 고통스럽고 불안하다. 그중에서도 나를 잡아먹어버리는 놈은 불안감이다. 내가 이 힘에서 벗어났을 때 힘이 더 이상 나침반이 되어주지 않을 때, 준비되지 않은 내가 마음만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2. 예술가 정신


  골드문트는 수도원을 벗어나 예술가가 되었다. 그의 예술은 방랑과 자유의 예술이다. 작업실에 앉아 연달아 작품을 생산하는 예술은 아니다. 예술가가 자신의 길이라고 믿었지만 작품을 한 번 토해내고 난 뒤 다시 시작할 수 없었다. 그렇게 다시 방랑은 시작되었다. 흔들리며 찾게 된 길이 다시 한번 흔들리게 된다면 또 한 번 떠날 수 있을까 싶다.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일일 것이다. 골드문트는 그럼에도 예술가였다. 다시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방랑이 필요했고 그의 경험들과 감각들이 작품으로 태어났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은 무상의 극복이다. 예술품 또한 인간처럼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존재지만 인간의 삶보다 더 오래 지속되며 거룩한 나라를 만든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이바지하게 됨으로써 무상한 인생으로부터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미술, 음악 등이 아니더라도 각자의 예술이 필요하다고 본다. 내가 여기서 정의한 예술이란 ‘나’의 정신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고 싶다.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자아실현은 필수적이라고 본다. 단어가 거창해서 그렇지 그냥 내 정신, 내 생각을 표현하고 형태로 남겨 보고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도 같다. 글을 쓰면 내가 누군지 알 수 있을까 싶어서. 남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나도 나를 모르고 죽으면 조금 억울하지, 아니 아주 많이 억울할 것 같다. 허무주의에 빠져 죽고 싶지는 않다.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면 오히려 마음 편히 살지도 모른겠다.




3. 지와 사랑


지의 나르찌스, 사랑의 골드문트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나는 둘 중 누구와 닮았는지 물어보게 되었다. 마음이 방황하는 요즘 나는 당연히 내가 골드문트라고 생각했다. 용기 없는 골드문트. 어느 쪽으로 가야 옳은 길인지 정하지는 못한 상황에서 단순히 멋있어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어 이리저리 흔들리는 중이다. 내가 이러고 있는 것은 사실 나르찌스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나르찌스가 골드문트의 세계를 이해하고 매료된 것처럼 나도 지금 단지 다른 세계의 맛을 일찍 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르찌스는 자기의 세계를 사랑하고 확신하지만 나는 여전히 모르겠다.


  사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체험으로만 극복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해야 하나보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골드문트가 그랬듯이 내가 좋아서 택한 길이 생각보다 다를 일이 수없이 많을 것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내가 다시 떠날 수 있을지 혹은 견뎌낼 만큼 좋아할 수 있을지이다. 내가 해왔던 것과 하고 싶은 것 중에(단순히 멋있어 보여서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다) 선택을 위해서 경험이 필요할 것 같다. 나에게도 골드문트의 방랑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은 자주 한다. 어쨌든 간에 내 선택에 대해서는 온전히 내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자꾸 신중해지지만 일단 뭐라도 해봐야 알 것 같은 기분이다. 그 방랑만이 관성에 계속 딸려가던가 관성을 벗어나던가 결정지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의 관성을 푸는 힘은 내 안의 나르찌스인 것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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