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렬 <간송 전형필>
"2만 원이오!"
지금 가치로 따지면 60억에 달하는 거금이 든 가방을 내밀었다. 천 마리의 학이 구름 사이를 날아오르는 듯 한 모습, 청초한 옥색에 아름답게 균형 잡힌 고려청자를 본 전형필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일본 골동품상이 제시한 값을 그대로 치렀다. 전형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명품청자라 생각해 단 1원도 깎지 않았고, 그러자 일본인 골동품상은 그 기세에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청자는 바로 《청자 상감 운학문 매병》. 광복 후 국보 제68호로 지정되었다.
간송 전형필을 알게 된 건, 불과 2년 전. 이따금 참여했던 독서모임에서 선정한 도서였던 이 책 때문이었다. 대학 때, 간송 미술관에 꼭 한 번쯤은 다녀오길 바란다는 교수님의 이야기를, 성북동에 가면 항상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려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만 했지, 그 안에 어떤 이야기가 숨어있는지는 몰랐다.
"왜 몰랐을까. 왜 이제야 알았을까"
책을 덮은 뒤 들었던 생각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그를 기억하고 싶다. 내 미약한 글을 통해서라도 조금 더 많은 사람들과 내가 느꼈던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 싶다.
책 <간송 전형필>은 온 생애를 바쳐 우리 문화를 지켜온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 선생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24살 어린 나이에 논 800만 평, 지금 돈으로 6천억 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전형필. 그는 왜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으며 문화재 수집에 평생을 바쳤을까.
그에게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이라는 스승이 있었다. 전형필에 '산골짜기 흐르는 맑은 물과 사시사철 푸른 소나무'라는 뜻의 아호 '간송'을 붙여준 사람도 바로 그다. "문화 수준이 높은 나라가 합병된 역사는 없다"는 신념으로 조선의 독립을 굳건히 믿으며 일제의 수탈로부터 민족의 얼과 혼을 지켜내자는 뜻을 함께했다.
조선 최고의 대수장가. 돈이 있다고, 안목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쉽게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명확한 책임의식과 결단력이 함께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길을 간송은 택했다. 그는 일찍이 큰 뜻을 도모하고 있었으니, 바로 최초 개인 박물관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1938년, 후대에 우리 민족의 찬란한 유산을 마음껏 향유할 수 있도록 성북동에 '보화각'(지금의 간송 미술관)을 짓는다.
간송은 삼국시대부터 조선말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서화 조각과 공예, 조형미술 등 모든 분야의 유산을 모았다. 고려시대 원숭이 어미가 새끼를 안고 있는 모양의 《청자 모자 원숭이 모양 연적》,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 신윤복의 《미인도》 《혜원풍속도》, 한글의 창제 목적과 원리를 밝힌《훈민정음》까지…. 일제에 넘어갈 뻔한 우리의 문화재들을 논을 팔아가면서 지켜냈다.
간송이 문화유산을 수집하는 과정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불쏘시개가 될 뻔한 겸재 정선의 화첩, 경성 미술 구락부 경매에서 조선백자를 1만 5천 원에 낙찰받은 이야기들은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아찔하기도, 무릎을 칠만큼 통쾌하기도 하다.
특히, 일본에 사는 영국 출신 변호사 가스비의 수집품 20점을 기와집 400채, 요즘 서울 아파트 최소 시세로 1,200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을 지불하며 문화재를 되찾아온 일화는 가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저자 이충렬은 2006년 간송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일대기를 책으로 펴내기로 결심, 3년 만에 탈고했다. 저자는 "간송의 이야기와 그가 지켜낸 문화재를 통해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과 긍지를 느끼는데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우리에게 찬란한 문화유산과 민족의 자긍심을 전해준 위인 간송 전형필. 어서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지난 2014년부터 간송 전형필(1906~1962)의 수집 발자취를 살펴보는 1부 전시 '간송 전형필'을 시작으로 2부(보화각을 다녀오다), 3부(진경산수화), 4부(매난국죽 선비의 향기), 5부(화훼영모)에 이어 현재는 6부 '풍속 인물화' 전시를 동대문 디자인플라자에서 진행하고 있다.
이제, 남은 건 우리의 선택. 그가 전 생애를 바쳐, 그의 모든 재산을 바쳐 남긴 문화유산을 마음껏 향유할지, 말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