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지를 눈앞에 두고 정신을 놓았다. 누르스름한 원고지를 바라보며 도대체 무엇을 써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중국에 온 지 6개월 남짓, 고등학교 1학년 어문语文 중간고사에는 500자 이상의 작문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작문 주제는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그럼 이제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하지? 아, 이 글자는 어떻게 쓰더라... 글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결국 나는 50자 남짓 쓰고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 주에 어문 선생님은 작문 시험지를 무작위로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 들어온 글을 읽고 같은 반 친구의 글을 평가하도록 했다. 그 반에 유학생은 나뿐이었다. 누구든 내 작문 답안지를 받은 친구가 손을 들고 발표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 순간 교실 반대편에 앉아있던 남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우리 반 한국 학생 Sun은 베이징의 얼화음儿化音을 제대로 배운 것 같습니다. “
"와하하하하"
같은 반 친구들의 웃음이 터졌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작문은 우리의 표준어에 해당하는 보통화普通话 어법에 맞추어 써야 하는데, 사투리 발음대로 글을 써버린 것이다. 예를 들면 "친구와 놀았습니다"라고 쓸 것을 "친구랑 놀았습니데이"로 쓴 것이다. 나는 정말 창피했지만 중국 친구들에게는 그게 꽤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때부터 나와 글쓰기의 악연이 시작되었다. 글을 쓰면 누군가에게, 그것도 아주 공개적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이 늘 부담이었다. 그 시작은 문법이나 형식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이었지만, 점점 글의 내용까지도 부담스러워졌다. 그래서 자물쇠 달린 일기장에만 글을 썼다. 나만 볼 수 있도록. 그러다 컴퓨터로, 폰으로 점점 옮겨와 꾸준히 일기를 썼지만, 누군가에게 보여줄 목적으로 글을 쓰지는 못했다. 나에게 글쓰기는 계속 일기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글을 꾸준히 읽어왔다. 물론 소설이나 에세이류만 편식하는 편이지만 말이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설을 읽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다. 책이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낫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또 글을 읽으며 내가 하지 못했던 경험을 대신할 때, 혹은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감정이나 느낌을 책에서 그대로 읽을 때면 늘 생각했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은 대체 뭐가 다를까, 나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종종 생각했다.
나는 이제 깨달았네,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걸,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겠어.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 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에서 서점 주인이 주인공에게 건네는 말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으며 모두 공감하지 않았을까? 멋진 날도, 그저 그런 날도, 내 인생이라는 책 한 권에 한 부분이 된다. 내 삶의 기록이든, 내 생각, 혹은 상상력의 기록이든 무엇이든 적어서 나만의 책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글에는 힘이 있다. 어렴풋한 생각, 흐릿한 감정을 글로 적어내고 나면 생각과 감정이 뚜렷하고 강해져서 정말로 그렇게 믿게 된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이 책을 읽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7년, 처음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그 당시에는 써놓은 글도 없었지만 일기장처럼 쓰던 소셜 미디어 주소를 하나 추가해 보내며 될 대로 되라는 마음이었다. 당연히 탈락이었다. 그 뒤로 글은 그냥 일기장에만 쓰고, 다시 신청해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최근 다시 브런치에 관심이 생겼다. 아니, 글을 쓰는데 관심이 생겼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테다. 친한 언니가 글을 기획하고 쓰는 걸 한 번 지켜봤는데 너무 멋있었다. 내 속에 잠들어있던 작가의 꿈이 다시 꿈틀댔다. 그리고 얼마 뒤 어느 주말 세 편의 글을 썼다. 큰 꿈을 소소하게 이루어가는 내 일상에 대해. 그리고 브런치 작가 신청을 했다.
이틀 뒤 합격 이메일을 받았다. 기뻤다.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다. 내가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내 이야기를 써낼 수 있을까? 자물쇠 달린 일기장에서 벗어나 불특정 다수가 볼 수 있는 플랫폼에 글을 쓴다는 것은 꽤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여전히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다 틀리고 내용도 매끄럽지 않다. 가끔 무슨 이야기를 쓰고 싶은 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그래도 계속 쓸 거다. 조금씩 꿈을 이루어가기 위해.
대문사진 출처: photy by Florian Klauer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