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히 모시겠습니다
“저기 엄청나게 큰 항아리 보여? 저건 자금성紫禁城 안에 불이 나면 불을 끄려고 물을 받아 놓던 항아리래. 원래 다 도금되어 있던 금빛 항아리인데 1860년에 8국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 때 도금을 벗겨갔다지 뭐야!”
베이징에 놀러 온 사촌동생들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말에 귀를 기울인다.
“잘 돌아봐. 여기 뭐가 없는지 알겠어? 눈 가리는 것 하나 없이 탁 트였지? 나무가 하나도 없어. 혹시 자객이 숨어들까봐 그랬대.”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동생들을 보며 내심 흐뭇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보따리도 다 풀어냈다.
한 도시에 8년쯤 살다 보면 그만큼 손님을 치를 일도 많아진다. 손님맞이를 여러 번 하다 보면 일정을 짜고 도시 관광을 하는데 준전문가가 된다.
베이징의 관광은 천안문天安門과 고궁故宮(중국에서 자금성을 부르는 이름)에서 시작한다. 가는 곳마다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금성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경산공원景山公園은 사실 황실의 정원이었다는 것과, 여름궁전인 이화원頤和園에 돌로 만든 배의 의미 같은 것들을 신나게 이야기했다. 또 천단공원天壇公園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었지만 또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곳이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마치고 나오며 자연스럽게 짝퉁시장 홍차오虹橋로 향한다.
베이징의 특이한 길거리 음식 구경을 빼놓을 수 없다. 왕푸징王府井거리를 걸으며 전갈꼬치 같은 독특한 음식 구경을 한다. 물론 저녁식사는 북경오리나 훠궈 같은 것으로 먹는다.
다음날은 사설택시를 예약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본 뒤 용경협龍慶峽에서 배를 타고 산 위의 경치를 감상한 후 시간이 되면 명십삼릉十三陵을 찍고 시내로 돌아오는 일정을 잡는다.
내가 처음으로 단체관광을 간 곳도 중국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친척들과 상해, 북경, 백두산을 가는 코스였는데 그때 가이드 아저씨, 언니는 마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사람들 같았다. 지나가는 길에 보이는 사소한 것에도 모두 의미를 만들어 주었다.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 그 장소들이 기억에 남아있다. 상해에서 갔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동방명주東方明珠를 보고 신기했던 마음. 흙먼지가 폴폴 날리던 천안문 광장에서 모택동毛澤東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초상화도 점점 나이 든 모습으로 변해왔다는 이야기. 백두산에서 안개가 살짝 걷히며 보이던 천지에서 반은 중국 땅이고 반은 북한 땅이라는 이야기도. 어린 마음에 가이드 분들은 늘 여행을 다니며 이야기보따리를 채우는 걸까 생각했더랬다.
홍콩으로 이사를 오고 나서는 더 많은 이들이 다녀갔다. 대학을 졸업한 시점이라는 것과 홍콩이라는 매력적인 여행지라는 복합적인 이유 덕분일 테다. 갓 홍콩에 오고 나서는 홍콩에 놀러 오는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다녔다. 그리고 홍콩에 대해 조금 더 많이 알고 나서 어떤 동선으로 이동해야 사람들을 조금 더 피할 수 있는지, 더 멋진 풍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는지 등을 소개할 수 있었다.
모두가 다녀가야 하는 유명 장소뿐만 아니라 현지인처럼 시간을 보내는 법을 소개하기도 한다. 홍콩에는 시내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아도 자연 속에서 하이킹을 할 수 있는 곳이 정말 많다. 그중 하나는 홍콩 하이킹의 입문자라면 꼭 거쳐가는 드래곤스 백Dragon's Back이다. 센트럴에서 3-40분 정도면 갈 수 있고, 걷는 코스도 컨디션에 따라 조절이 가능해 홍콩에 며칠 놀러 온 사람들도 다녀가기에 충분하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사이쿵Sai Kung같은 어촌마을도 다녀갈 수 있다. (캐런정 작가님의 빌딩 숲을 떠나 "사이쿵"으로 가자 편 참고)
물론 홍콩에서도 건물이나 지역 역사에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보따리를 채워가는 것도 그 재미 중의 하나이다. 예를 들면 풍수지리를 아주 중요하게 따지는 홍콩에서는 건물마다 풍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야경 사진에서 지그재그 모양의 라이트로 눈에 띄는 중국은행 타워는 음기가 강한 홍콩에서 양기를 불어넣기 위해 칼의 모양으로 만들었다. 그와 멀지 않은 곳에 홍콩의 HSBC의 본사 건물이 있는데, 그 옥상에는 대포 모양의 기중기가 있고, 그 대포는 중국은행 건물을 향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가족이나 친구들은 홍콩 여행을 조금 더 오래, 즐겁게 기억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부터 내 세컨잡은 여행 가이드라고 이야기하고 다녔다. 물론 거기서 수입이 있거나, 전문 가이드 분들처럼 빠짐없이 모두 알고 소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누군가의 여행을 더 편하게, 그리고 즐겁게 만들어준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다. 얼른 이 코로나 시국이 끝나서 다시 가족들, 친구들이 홍콩으로 놀러 올 수 있는 날이 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