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고학자'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가?
만약 '인디아나 존스'를 생각했다면 나보다 더 어르신(?)이실테고, '미이라'를 떠올렸다면 비슷한 연배가 아닐까 한다. 그래도 인디아나 존스의 주제가만큼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본 적도 없지만 주제가를 듣는 순간 모험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영화에서 고고학자는 꼭 모험가 같다.
고고학자는 동식물이나 인류가 지난 시대에 남긴 흔적을 찾아내고 이들의 역사를 밝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처음 고고학자의 존재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초등학생 때 본 영화 '미이라'를 통해서였다. 피라미드에 들어가서 그림 같은 문자를 읽고, 특이하게 생긴 물건의 용도를 알아차리고, 또 어디선가 보물을 찾아내는 그런 사람처럼 보였다.
정말 고고학 혹은 고고학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를 읽고 나서다. 중학생 때 있던 만화/도서대여점에서 만화책과 소설책을 정말 많이 빌려봤다. 거기서 람세스라는 책을 보고 읽게 되었다. 정말 두꺼운 책이었고 총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시리즈였는데 그 스토리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때는 심지어 인터넷에서 이집트 상형문자를 외워 파라오의 이름을 적어보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작가의 '빛의 돌'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빛의 돌'은 피라미드나 신전의 벽화, 조각, 건축 등을 하는 장인들의 이야기였다. 책을 읽는데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장면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렇게 고대 이집트 문화, 상형문자 등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대체 어떻게 그 시대의 의상이나 물건들을 찾아내고, 사용 방법들을 알아냈을까? 어떻게 상형문자를 해독해 그 시절의 역사를 알게 된 걸까? 이 시대가 발견한 흔적으로 추측한 그 시대는 우리의 추측과 얼마나 비슷할까?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해낸 사람은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다. 지금은 대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로제타석을 통해 해독할 수 있었는데, 이 돌에는 같은 내용이 두 종류의 이집트 문자와 고대 그리스어로 적혀있었다고 한다. 샹폴리옹은 그 로제타석과 오벨리스크에 적힌 이집트 문자와 로제타석의 그리스어를 통해 해독했다. 이를 토대로 고대 이집트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을까? 나도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아직 세상에 밝혀지지 않은 역사나 문자를 밝혀내는 일들을.
평범한 직장인인 내게도 그런 기회가 생겼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유물을 발굴하거나 다른 나라의 유적지를 발굴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 큰 의미를 가진 일이기도 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문자를 해독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할아버지는 늘 저녁 식사 후 정리가 되고 나면 식탁에 앉아 일기를 쓰셨다. 내가 유치원에 다닐 때도,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닐 때도 늘 같은 모습으로. 내가 중국으로 유학 간 후에는 그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지만, 할아버지께서 편찮아 글을 쓰실 수 없어지기 전까지는 늘 그러셨을 테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유품을 정리하는데 할아버지께서 십여 년 간 적어두신 일기장 수십 권이 나왔다. 몇 번 들추어 보았지만 번체, 간체, 일본식 한자가 모두 섞여 거의 해독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그 이후로는 별로 들여다본 적이 없다.
몇 년이 지나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온 가족이 할머니 댁에 모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거실에 있는 장식장 안에 꽂혀있는 책을 구경했다. 일본어로 된 책이 많았다. 할아버지께서 고희연 때 일가친척을 대상으로 발표하셨던 자서전도 있었다. 그 책을 꺼내 읽다 보니 그 위에 꽂혀있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같은 표지로 제본된 책이 3-40권 정도 꽂혀 있었다. 늘 잡지일 거라 생각하고 지나쳤는데 책등에는 한자로 일기장(日記帳)이라고 적혀있었고 제1권부터 제45권까지 나누어져 있었다. 꺼내보니 할아버지께서 직접 쓰신 일기 원본을 할머니께서 다 제본해두신 것이다.
우리는 둘러앉아 첫 번째 일기장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다.
1988年 3月 1日부터 쓰기 始作(시작)함
그 안에 日記(일기)를 쓰다 마다가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제부터 세상을 떨 때까지 하로도 거러지 않고 꼭 일기를 쓸 결심으로 日記(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각자 자기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또 다음 권에서 찾고 싶은 날짜를 펼쳐보기도 했다. 내가 큰아빠, 고모들에게 이야기했다. “할아버지 일기 전산화해볼까요?” 그랬더니 어른들께서는 좋은 생각이라고, 이렇게 놔뒀다가 다 없어질지도 모른다며 얼른 해보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나마 나는 한자나 일본어를 읽을 줄 알지만, 다른 가족들은 읽지도 못할 거라며. 그래서 그중 첫 세 권을 챙겨 와 틈틈이 컴퓨터로 옮기는 중이다.
제2권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記錄(기록) 後日(후일) 나의 子女(자녀)들에게 父母(부모)에 對(대)한 追憶(추억), 흘러간 時代(시대)에 對(대)한 歷史的(역사적) 事實(사실) 參考(참고)로서 所重(소중)한 資料(자료) 活用(활용)이 되겠금 記錄(기록) 해 둔다. 나는 父母(부모)가 냄긴 筆跡(필적) 하나 保存(보존)하지 못한 것을 恒時(항시) 가슴 아파했다.
글이 번진 곳도 있고 읽기 힘든 한자나 한글도 있다. 하지만 문맥 상이나 앞에서 밝혀둔 할아버지의 서체로 내용을 조금씩 맞춰가고 있다. 어떤 부분은 정말 그 시대에 있던 큰 뉴스를 담아두셨다. 88 올림픽이 끝나고 신문에서 메달 수를 집계한 부분을 오려 붙여두기도 하셨고, 가족모임의 기록도 있었다. 그중 찾은 내 이야기.
OO 돐잔치 돐 一個月前(일 개월 전)부터 自由(자유)롭게 步行(보행)을 하고 있다
이렇게 사랑을 담아 적어두신 우리 가족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옮겨 적어두고 싶다. 가능하다면 그 시기의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도 함께 찾아서 담고 싶은데, 한국에 가야 찾아볼 수 있겠지. 온 가족에게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추억, 그리고 흘러간 시대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 전달될 수 있도록, 인류의 역사를 밝히는 고고학자는 아니지만 우리 가족의 역사를 밝혀가는 손녀의 꿈은 진행 중이다.
* 할아버지께서 쓰신 한글 단어는 바꾸지 않았고, 한자는 모두 번체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