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만 해도 설레는 단어가 있다.
어릴 때부터 여행과 관련된 책을 많이 접했다. '먼 나라 이웃 나라'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같은 책들을 보면서는 세상엔 참 신기한 게 많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 '집을 수리해드립니다' 편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비야 씨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중국견문록', 그리고 '지구 밖으로 행군하라' 등을 읽으며 여행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나도 배낭을 메고 여행을 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박준 씨의 '온 더 로드'를 읽으며 다양한 나라에서 온 여행자들과 카오산 로드에서 만나는 경험을, 손미나 씨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읽으며 시에스타와 정열적인 플라멩코 춤을 추는 경험을 대신했다. 어떤 책에서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에서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을 바라보고, 페루의 마추픽추에서 고산병에 걸린 것만 같았다. 책뿐만이 아니다. 영화 '툼레이더' 속에서 앤젤리나 졸리 언니가 앙코르와트를 누비는 모습을 보고 언젠가 저곳에 가 있을 나의 모습을 상상했고, '미이라'를 보면서 언젠가 스핑크스 앞을 지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렇게 여행은 나의 꿈이 되었다.
직업은 수입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건 언제부터일까?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는 시기가 있다. 단순히 여행을 하는 일이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여행을 가기 위해서, 또 그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 수입이 필요하다. 한창 여행 에세이들을 읽으며 여행작가 혹은 여행사진가는 계속 여행을 할 정도의 수입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여행사진가, 혹은 작가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 있었다. 글도 못쓰고, 사진도 못 찍는다는 것. 이 꿈은 내 머릿속에만 오래도록 머물렀다.
직장인이 되기 전에도 꽤나 알차게 여행을 다녔던 것 같다. 물론 금전적인 제약이 있었지만 말이다.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친구와 함께 27시간이 걸리는 기차에서 3층 칸 침대에 누워 베이징北京에서 구이린桂林까지 간 여행이나, 11시간 잉쭈어硬座칸을 타고 베이징에서 따퉁大同에 가서 현공사懸空寺와 윈강석굴雲岡石窟를 본 여행은 시간은 많지만 돈이 없던 학생 시절에 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직장인이 되고서 돌아보니 내가 여행을 할 만큼의 돈은 벌지만 시간을 내는 게 더 큰 문제였다. 누군가와 시간을 맞춰 긴 여행을 가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다행히 내가 다니는 회사는 휴가를 내기 어려운 곳은 아니었고,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는 내게 누군가 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 여행을 가는데 걸림돌이 되지는 않았다.
나에게 여행은 계획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휴가를 낼 날짜를 마음속에 정해두면 그즈음 여행하면 좋을 곳들을 생각한다. 비행기 표도 검색을 하고, 몇 개의 도시를 여행할 수 있을지, 또 그곳에 가면 꼭 보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들을 적어본다. 보통 열흘에서 이 주 정도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조금 멀어도 괜찮다. 그렇게 시간과 장소가 정해지면 나는 여행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책이나 영화를 찾아본다. 그러면 여행책자나 인터넷 검색으로 알게 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알게 된다. 여행지로 떠나면 일정을 빡빡하게 잡지 않는다. 어떤 날은 여행객이 아닌 현지인처럼 지내고 싶은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아침에 나가서 조깅을 하고, 그냥 카페에 앉아 책을 읽거나 사람 구경을 한다. 여행지에서 정처 없이 걷다가 길을 잃는 것도 즐겁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엽서를 발견하면 가족, 친구에게, 그리고 나에게 엽서를 보낸다.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와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내가 보낸 엽서를 받으면 그 엽서를 쓰던 순간의 느낌과 지난 여행의 기억이 살아난다. 엽서를 받고서 비로소 내 여행은 끝이 난다.
직장생활을 시작하고서 지난 8년간 매년 여행을 다녔다. 혼자, 또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대만, 스페인, 이탈리아, 미얀마, 베트남, 태국, 일본, 미국, 호주... 코로나로 인해 작년에는 여행을 가지 못했지만, 앞으로 상황이 좋아진다면 다시 여행을 할 수 있을 날이 올 거라 믿는다. 퍼즐을 맞춰 가듯이 한 곳, 또 한 곳 여행을 하다 보면 내 마음속 지도 구석구석을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꼭 무엇이 되어야 꿈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꿈도 마치 행복처럼 조금씩 이루어가는 걸지도 모른다. 내 삶에 늘 여행이 있기 때문에, 내 꿈은 늘 이루어지는 과정에 있다고 느낀다.
아직도 나를 설레게 하는 그 단어. 바로 여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