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

[Day 1] 맥시멀리스트의 미니멀 스리랑카 여행

by Sun
숙소에서 보이는 라이언락


네 시간이 넘게 걸려 도착한 호텔은 벽이 없이 뚫린 로비가 이미 이국적인 느낌을 줬다. 체크인 드링크로 받은 우유죽같은 것도 맛있었다. 낮은 1층짜리 건물이 몇 채 늘어서 있다. 방 앞에는 테라스처럼 앉아서 바깥을 볼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있었다. 내 방은 6번이었는데 방 앞 정원 같은 곳으로 나오면 라이언락이 잘 보였다. 방에서 뒹구르르 하다가 수영장 옆에도 잠시 앉아 있었다. 우다다다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원숭이들이 이 나무, 저 나무 넘나들다 지붕 위를 뛰어다녔다. 뭔가 홍콩에서 하이킹할 때 만났던 원숭이처럼 사납게 다가와 물건을 빼앗아 갈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후 4시가 가까워져도 해는 뜨거웠다. 작지만 예쁜 수영장이 있다. 수영장에 들어가는 할머니들도 계셨다.


지붕을 뛰어다니는 원숭이


점심을 먹지 않았더니 배가 고파왔다. 아직 여기에 와서 로컬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잠시 고민을 하다가 호텔에서 가볍게 샌드위치를 먹기로 했다. 샌드위치는 생각보다 비쌌고 맛있었다. 오늘은 시기리야에 와서 휴식을 취할까 했지만, 에너지가 아직 좀 있다. 피두랑갈라Pidurangala에 하이킹하러 갈까 했지만 조금 덥다. 가까운 곳에 걸어서 갈만한 노을 포인트를 찾아보았다.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마파갈라Mapagala는 5분 정도 산길을 올라가면 멋진 전망을 볼 수 있는 언덕이다. 아주 짧은 길이지만 아주 편안한 길은 아니니 주의가 필요하다.


마파갈라 입구에서 정상으로 가는 길


올라가면 라이언락 이외에는 높은 건물이나 산이 없어 탁 트인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이미 올라와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이 꽤 있었지만, 너무 붐빈다는 느낌은 없었다.

정상에서 보이는 멋진 풍경와 노을을 기다리는 사람들

자리를 잡고 앉아 점점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았다. 하늘이 조금씩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매일 뜨고 지는 해인데, 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이렇게 노을을 찾아다니는 걸까? 프로 노을 중독자로 올해 본 노을 중에 가장 멋졌다.


점점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하늘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내려왔다. 아주 짧은 등산(?)이지만 어두워지면 내려가기 위험할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가기 전 주변에서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구글에서 근처 식당들을 보니 평점이 높은 곳들이 꽤 있었다. 명절이라 문을 닫은 곳도 있었다. 그중 가장 가깝고 평점이 높은 Pradeep restaurant로 결정했다. 나무로 지은 건물의 2층에 있어 계단을 오를 때마다 삐그덕 소리가 났다. 테라스처럼 도로 쪽으로 조금 나와 있는 공간과 실내 공간이 있었다. 밖에서 볼 때와 다르게 사람들로 꽉 들어차 있었다. 나는 그나마 이름을 들어본 꼬뚜Kottu를 먹기로 하고 치즈꼬뚜와 제로 콜라를 시켰다. 로티를 기름에 볶아 만드는 꼬뚜는 생각보다 너무 맛있었다. 샌드위치를 먹은지 얼마 안되서 배가 금방 찼다. 계산을 하려고 하니 서버의 눈이 동그래진다.


서버: 왜 다 안 먹었어? 뭐 잘못된 게 있었어? 맛없어? 나: 아니 너무 맛있었어. 배가 불러서. 포장해 갈 수 있을까? 서버: 그럼. 포장해 줄게. 진짜 맛없었던 건 아니지? 나: ㅋㅋㅋ 진짜 맛있었어. 나올 때는 보니 사람들이 막 줄을 서 있더라. 시기리야에 있는 3일 동안 또 오게 될 것 같은 곳이다. 숙소 바로 건너편이라 더 편하기도 했다.


숙소에 돌아와서는 책을 보았다. 이번 여행에 함께하는 책은 말리의 일곱 개의 달(The Seven Moons of Maali Almeida)이다. 어딘가로 여행할 때면 늘 도시나 나라 배경의 소설이나 영화를 본다. 스리랑카 소설이나 영화에 대해선 아는 게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번 여행의 설계자, 챗지피티에 물어봤다. 5개 정도 소개해 준 책 중에 이 책이 가장 최근(?) 책이었고, 또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받은 부커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해서 골랐다. 그리고 약간의 판타지가 섞인 거라 더 마음이 갔다.


스리랑카에는 사람이 죽으면 7개의 달(일곱 밤)을 보내고 빛으로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주인공 말리는 내전이 한창이던 스리랑카에서 전쟁터를 누비며 사진을 찍던 사진작가이다. 국제 신문사에 사진을 팔기도 하고, 군부와 일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죽었고, 그의 영혼이 그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이승에 남아서 생기는 일이다. 여행을 오기 전에는 하나도 알지 못했던 스리랑카의 역사나 문화를 소설 속 말리를 통해 조금은 엿볼 수 있다. 스리랑카에서 어떤 민족이 있는지, 왜 내전이 생겼고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지, 스리랑카 사람들의 입장과 인식은 어떤지. 소설 속 배경은 1990년대인데, 생각해 보면 평화로워 보이는 이 땅에서 고작 2~30년 전에도 내전이 있었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다.


(단기) 미니멀리스트의 하루는 빨래로 끝난다. 무더운 날씨에 찌든 티셔츠를 빨아 잘 마르도록 널어두었다. 꿈꾸지 않고 깊이 잠들기를 바라며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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